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월의 단비 Dec 12. 2022

넝마주이 망태기

당신의 망태기에는 무엇이 있나요?


    미국의 어느 소년이 길을 걷다 5달러 자리 지폐 한 장을 주웠다.

    그는 너무 기뻐 그 다음부터 집을 나서며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길바닥을 살피며 걷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는 일생 동안 길에서 물건을 줍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가 주은 물건들은 단추 29,519개, 머리핀 54,172개, 수 천 개의 동전과 수많은 자질구레한 것들이었다. 그 소년은 이런 것들을 줍는 동안 푸른 하늘을 한 번도 쳐다보지 못했고 아름다운 꽃과 산을 바라본 적도 없었다. 길에서 스쳐 지나는 다정한 이웃과 인사도 못한 채 지나쳤으며 마주 오는 자동차에 몇 번이나 부딪힐 뻔했다. 그의 인생은 그렇게 넝마주이가 되었다.


생각해 본다.
 소년이 5달러를 주었던 날은 아마도 억세게 운수가 좋았던 날이었다고.

  그만의 사정으로 돈이 간절히 필요하던 어느 날, 방법이 없어 절망스레 고개를 떨구며 걷던 어느 날, 바닥에서 만난 5달러는 어쩌면 그에게 생명수와 같았을지 모른다. 살아가는 방법을 모르던 소년이 길에서 사는 법을 깨달은 날이기도 하다. 그 후 바닥을 보며 걷는 것은 소년에겐 더 이상 절망이 아닌 희망이 되었고, 소년이 주은 넝마들은 먹을 것과 쉴 곳을 주고 5달러의 행운처럼 운수 좋은 날을 기대하게 했다.

   넝마주이의 삶이 유일한 생존법이던 그에겐 누군가가 땅에 떨구고 간 가치 없는 것들이 소중했을 테니, 그에게 '가치’ 란 푸른 하늘도 아름다운 꽃과 산도 다정한 이웃의 인사도 아닌 것이다. 배운 것이 그뿐이던 소년이 넝마주이가 된 것을 두고 탓할 수 있을까. 망태기에 담긴 단추, 머리핀과 수천 개의 동전을 소중하게 여긴 그의 삶이 가치 없다 말할 수 있을까. 소년의 망태기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물건은 제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하여도 담길 수 없다. 그는 그저 충실했다.  


우리 모두에게 넝마주이 망태기 하나쯤은 있으리라 어렴풋이 알게 된 건,

  결혼 후 여러 번의 큰 다툼 속에서 시작되었다. 삶 속에 각자의 아픔은 누구에게나 있고 그렇게 생겨난 사정이 넝마주이 시절을 보내게 한다고. 생존을 위해 각자가 주어 올린 넝마는 아마도 내 안의 불안과 초조를 잠식하기 위한 것들이 아니었을까.

   넝마주이에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려 준 이가 있었더라면, 망태기를 지고 바닥 만을 헤집진 않았을지 모른다. 내게도 그런 인연이 있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정중히 다가와 나의 망태기 속 넝마들을 물어주던 사람. 가끔은 그런 친구 앞에 나의 넝마가 초라하게 느껴져 손에 쥐고 감추고 있을 때면 천진하게 그 가치를 물어주던 사람이었다. 그러곤 나에게 어울리는 행복이라며 하늘을, 꽃을, 푸르른 산을 보여주던 사람이었다. 그때의 나는 친구의 넝마를 봐줄 줄 몰랐다. 이제야 조금은 눈을 뜨는 내 서른아홉의 어느 날, 그는 갑작스레 하늘로 떠나고 이 세상에 없다.

  그를 떠나보낸 후 나의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전문가를 찾았다. 나의 감정은 가족을 떠나보낸 상실과 맞닿아 있는데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그가 남긴 마음의 유산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가 내게 십여 년간 주문처럼 말하던 것은 “수인씨 만의 행복을 찾으세요. 지금 여기서.”이다.

  그런 그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하여 그가 남긴 가치마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그를 통해 고개를 들어 바라보게 된 나만의 행복 찾기는,

  어쩌면 남편을 알아보는 눈을 뜨게 한 지 모른다. 나의 남편은 자신을 투명하게 내어 보인다. 가끔은 너무도 투명하여 눈을 질끈 감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렇기에 보이지 않는 우물을 만들지 않는다. 그의 투명한 호수가 나의 불안을 잠재운다. 서로의 본질을 사랑하기 위한 걸음은 서툴지만 더없이 귀하다. 그러니 서로의 넝마를 이해해 보기로 했다.

  결심이 행위까지 단박에 된다면야 좋겠지만 이해의 습관을 위한 끊임없는 연습은 나의 생각을 지우는 수행의 길을 걷게 한다. 결혼은 서로의 원초를 바라보게 한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고, 타인의 본능을 가까이서 보게 된다는 건 때론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기도 하다. 기대하는 바를 내려놓고 오롯이 바라보아야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이 아닌 행위로 배워가는 중이니 우리는 참으로 서툴 수밖에.

  

가족은 서로의 넝마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존재들.

 인연이 닿아 부부가 되었고 자식을 낳는 천륜을 빚는다면 푸른 하늘을 모르던 자들도 기적의 기쁨을 가져본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식에게 꼭 멋진 부모이어야 그것이 사랑일까. 그런 귀한 인연 속에서도 서로의 넝마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깊은 고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고독은 결국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을 결혼을 통해, 소중한 친구의 죽음을 통해 눈을 뜨고 비로소 알아간다.


배움은,

어린아이와 늙은 노인에게도,
값비싼 것과 가치 없는 넝마에도,
삶과 죽음의 그 어디쯤에도,

그렇게
지천에 피어있다.  

  넝마주이의 눈동자는 불안하지만 오늘도 분주할 것이다.

그의 망태기를 함께 열어보며 살기 위해 주워 모은 애착 넝마를 바라봐 주고 싶다. 그것들로 버텨온 날들을 위로하여 주고 싶다. 그리고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고개를 들어 푸르른 산과 들과 꽃, 그리고 눈부신 하늘을 읊어주고 싶다. 알고 있다면, 할 수 있다면, 조금은 용기 내어 너와 나의 넝마를 바라봐 주는 푸른 봄날이 오길. 가족의 인연으로 기적을 쌓아 올린 우리들은 어쩌면 가장 닮은 넝마들을 주워 담은 사람들 일지 모른다고 위로하는 날들이 오길. 신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으로 존재 자체를 귀이 여겨주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어쩌면 아이를 가져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벤츠 사주는 멋진 엄마가 되지 못할까 봐 겁이 났는데, 행복을 알려줄 수 있는 엄마라면 멋지지 않아도 우리는 언제나 변치 않는 사랑이지 않을까.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34절 말씀]   



먼 길을 앞서 간, 나의 소중한 친구를 기억하며.

2022년 오월, 이수인 씀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절대로 영원한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