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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초이 May 09. 2023

훈육은 어려운 법이다.

가족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엄마는 아들이 게임을 멈추지 않는다고 때리고, 아들은 맞은 것이 화가 난다는 이유로 엄마를 팔로 밀쳤다는 소문을 들었다.


  자녀가 부모에게 대든다고 폭력으로 맞대응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다. 성별, 나이 차이, 신분, 부모 자식 간에도 서로의 폭력행위는 정당하지 않다. 아들이 나쁜 행동을 했다고 엄마도 나쁜 행동으로 응징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쁜 행동을 한 아들은 기회를 잃는다. 용서를 구하고 잘못을 반성할 수 있는 기회 말이다. 나쁜 행동을 바로잡으려면 선한 말과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 화가 난다고 회초리를 드는 것은 훈육이 아니고 화풀이다. 가르침을 주려면 이성을 찾아야 한다. 차분하고 냉정한 감정 상태에서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훈육이 어려운 법이다.


 아들이 엄마를 밀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보자. 엄마는 어땠나. 아들이 자신을 팔로 밀쳤을 때 머릿속에 분노가 생겼고 응징하려고만 했다면 문제가 있지 않을까. 아니면 어떤 상황이 저 애가 나를 밀치게 했나. 나의 말과 행동 중에서 어떤 것이 방아쇠가 됐나. 아들이 엄마란 존재가치를 무시할 만큼 분노하게 만든 것이 어떤 것인가 자문해 볼 수는 없었나 말이다.


 엄마는 어른이다. 미성년 아들보다 이성으로 감정을 누를 수 있는 힘을 가진 성인이다. 이성적인 성인이라면 상대가 왜, 어떻게 분노하는가의 원인을 찾으려고 애써야 한다. 말로만 성인이면 어른이 아니다. 아들이 나쁜 감정 상태에서 벌인 행동을 어른인 엄마도 감정이 앞서, 때리는 나쁜 행동으로 훈육하는 것은 화풀이, 분풀이로 전락하게 된다. 아들은 다음에도 대들고 말을 듣지 않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될 뿐이다.


이럴 때가 있다. 아들이 모처럼 공부를 하려고 마음먹고 막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엄마나 아빠가 "야! 공부 좀 해" 그러면 기분 잡쳐 버린다. 공부하기 싫어지는 것이다. 자신이 공부하려고 마음먹고 공부를 하면 공부도 잘되고 성취감이 생긴다. 왜냐, 자신이 놀고 싶은 유혹을 이겨냈으니까. 자존감이 막 올라간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공부해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텐션이 떨어져 버린다. 이건 아들의 자존감에 상처를 준거다. 나아가 아들이 스스로 공부하고 있으면 , 엄마 아빠가 아이고, 우리 아들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공부를 하고 있네 하는 칭찬을 들을 기회를 박탈했다. 가만히 있으면 만사형통인데, 순간만 참으면 알아서 공부하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순간을 못 참고 말을 해버림으로 가정 분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들이 이럴 수도 있지 않을까. 게임을 하다가 보니 너무 잘 되네. 와, 오늘 게임 컨디션 최곤데. 열심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임만 하는 거다. 그런데 이러다, 엄마 아빠한테 혼날 건데, 멈춰야 하는데 더하게 되면 반드시 혼날 텐데. 지난번에도 조금만 더 더 하다가 혼났었는데. 엄마 아빠 잔소리에 분노가 뻗쳐 며칠간 기분 엉망이었지 멈추자, 멈추고 공부를 하자, 엄마가 그만하라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멈추는 모습을 보이자. 나도 스스로 멈출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다음엔, 엄마 아빠가 잔소리를 안 하시겠지. 아들이 게임에 몰두하다가도 스스로 멈추고 공부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시게 만들어야지. 내가 알아서 멈추면 잔소리를 듣지 않아서 좋고 가정에 분란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 게임을 멈추고 싶지 않은 마음이지만 순간만 참으면 가정이 행복해질 거야 등등 이런 마음속 갈등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엄마가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어휴 아니에요. 재는 요, 시키지 않으면 안 하는 애예요. 그만하라고 열두 번도 더해야 멈추는 애예요. 제가 한두 번 해봐요."


글쎄다. 그렇게만 생각해야 하나. 아들이 30분만 하려고 마음먹고 막 끝내려고 했는데 엄마가 "야 게임 좀 그만해." 하는 잔소리에 반발심으로 30분을 더했다면. 게임 한 시간만 하고 책상에 앉아 공부하려고 58분쯤에 멈추려고 했는데 엄마의 공부 좀 해라고 하는 소리에 에이, 한 시간 더 하자고 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 순간, 잔소리의 순간, 멈추려고 했던 순간을 참지 못하고, 상대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내지르는 소리에 평화가 깨진다. 각자가 조금만, 순간만 참았더라면 갈등구조로 변질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다.


아들이 엄마를 밀치는 행동을 하기 직전까지의 아들을 누가 훈육했나. 엄마 아빠가 그렇게 키운 거다. 다른 나쁜 친구를 만나서 변했다, 방송매체를 보고 배웠다 하겠지만, 나쁜 친구를 만나도 배우지 않을 수 있고, 방송을 보고도 따라 하지 않을 수 있다. 나쁜 것들을 수용하지 않을 수 있는 정신력을 갖도록 키웠어야 한다. 아닌가. 부모가 그렇게 키우지 않았으니 그럴 수 있는 거다. 물론 100% 부모의 양육 책임이라고 몰 수는 없다. 하루에 부모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따지면 많지 않으니까. 학교, 학원 등 외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고 그만큼 친구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아서 그런 비행친구를 만날 기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런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지 않아도 외롭지 않은 정신력의 아이로 키우는 부모가 될 수는 있지 않을까.


 그래서 훈육이 실로 어려운 법이다. 나라의 동량으로 키우려면 그만한 노력 없이 될 수 없다. 스스로 뜻을 세울 수 있을 때까지 부모의 노력은 눈물겨울 수도 있지 않겠나. 거저 잘 되는 자식이 어디에 있나. 알아서 인물이 되길 바라는 것은 인생사 공짜를 바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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