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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다리 May 23. 2019

초딩 딸과 임도 걷기 백패킹

걷다 보니 무려 8.5 키로를 걸었네!



초등학생 딸과 백패킹을 떠나기로 했다. 기억에 남을 아빠와의 추억을 딸에게 만들어 주기 위해, 집에만 있기에 너무 아까운 모처럼 생긴 아빠의 3일 휴일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서다. 


딸과 백패킹을 나설 땐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 장소 선정, 음식 정하기 등 준비 사항을 딸 기준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아빠 마음 같아선 스트레스를 날린 멋진 전망과 아름다운 야경을 즐길 수 있는 산 정상으로 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다신 아빠와 같이 가지 않겠다고 할 게 뻔하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멀지 않으면서 접근이 용이한 곳을 찾아야 했고, 선택할 곳이 많지 않았다. 맨 처음 백패킹을 했던 강천섬을 갈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곳을 가보고 싶어 찾다 찾다 결정한 곳이 용인 임도길이다.





딸이 짊어 멜 배낭은 속이 꽉 차 보이지만 침낭 하나가 전부다. 나머지 짐은 온전히 아빠 몫이다. 새로 사들인 백패킹 배낭에 나머지 짐을 채우다 보니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82리터 용량을 초과하게 되고, 무게도 무려 23 kg에 육박한다. 뭐 괜찮다. 된비알을 오르지도 않을 것이고 한 시간 이상 걸을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하룻밤 묵을 살림살이를 챙겨야 하는 백패킹 특성상 출발 전까지 정신이 없다. 혹시 빼먹은 준비물은 없는지 다시 들여다 보기도 하지만, 백패킹 장소에 도착해서 배낭을 풀어보면 챙기지 못한 건 늘 생긴다. 그것이 김치일 때도 있었고, 쌈장을 안 챙긴 적도 있었지만, 하루 없다고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아쉬움이 긴 여운을 남기기는 하지만. 


이번에도 뭐 빠진 건 없겠지 약간의 불안감을 갖고 출발을 한다. 1시간 정도 운전을 하고 철쭉이 여기저기 피어 있는 조그만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5월 중순 주말 날씨치곤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고, 주차장 건너편 소나무 숲에는 이 맘 때쯤 한창인 송화가루가 여행을 떠나려는 듯 살랑이는 바람에 몸을 싣고 공중부양을 하고 있었다. 






올해 1학기 반장을 맡고 있는 둘째는 백패킹을 떠나기 전 오전에 학교에서 하는 리더십 캠프를 다녀왔다. 거기서 무슨 수업을 들었는지 오늘따라 유난히 딸은 걷고자 하는 의욕이 대단했다. 산 꼭대기에 올라가도 좋을 것 같다고도 했고, 처음 계획했던 거리보다 더 걸을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다. 


애초 계획은 1시간 이내로 걷는 것이었는데, 더 걷자는 딸의 제안에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기존 목적지를 지름길로 빨리 가기로 하고, 임도 중간에 있는 데크를 목적지로 바꿨다. 







지름길인 만큼 산길처럼 오르막 경사가 장난이 아니었다. 2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오르막길이었지만 20킬로가 넘는 박배낭을 메고 오르는 동안 땀구멍이 활짝 열린 듯 땀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몸이 적응하기도 전에 만난 오르막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조금씩 꾸역꾸역 올라갔다. 



 





그렇게 올라간 오르막 끝은 공원처럼 잘 꾸며져 있었고, 그 공원은 임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시야가 확 트이고 조그만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박지로도 손색이 없었다. 그렇지만 변경된 계획대로 이 곳에서 잠시 땀만 식히고 난 후 본격적으로 임도길을 걷기 시작했다.






5월 초만 해도 연둣빛 조그만 잎들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느낌이더니 그 연둣빛은 금세 녹색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잎 크기도 벌써 다 자란 듯했다. 덕분에 숲 사이 뚫린 임도길에는 제법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사방이 온통 녹색 투성인 그 임도길이 맘에 들었다. 초입에 들리던 차 소리도 숲 속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멀어지고, 대신 새소리, 벌레소리가 또렷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 구경하기도 쉽지 않았는데 토요일 늦은 오후 임도길을 걷는 동안 초반에 중년 부부를 만난 후 보이지 않았다. 이 시간만큼은 산등성이 위 임도는 우리 부녀를 위해 펼쳐진 길임이 틀림없었다.  


딸과도 주로 자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임도 초반엔 잣나무가 자주 보여 상록수가 무슨 뜻이고 어떤 종류의 나무가 있는지 설명을 해 주었고, 떡갈나무가 왜 그런 이름이 생겼는지를 배운 딸이 이번엔 나에게 설명해 주기도 했다. 또 애기똥풀을 꺾으면 나오는 노란색 물이 매니큐어처럼 바를 수 있다고 말하면서 같이 찾아보자고 했지만 5월 초중순 산속엔 노란색 꽃은 민들레 빼고는 찾기 쉽지 않았다.


민들레 꽃이 지고 난 후 그 자리에 생긴 둥근 흩씨가 길가엔 흔하게 보였다. 그걸 볼 때마다 딸은 스틱으로 치면서 그 흩씨를 흩뜨려 놓았다. 멀리멀리 날아가 더 많은 민들레가 피었으면 좋겠다면서. 걷다가 심심해지면 하늘을 쳐다보며 구름이 어떤 모양인지 상상을 하기도 했다. 미세먼지가 조금 있는 날이었지만 숲 위로 보이는 하늘은 마냥 푸르기만 했다.







서두를 필요 없이 임도 여기저기 구경을 하며 천천히 걷다 보니 우리가 머물고자 했던 데크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 데크에는 남자 두 명이 벌써 텐트를 치고 자리 잡고 있었다. 멀리서 볼 땐 분명히 비어있던 데크였는데 우리가 여유롭게 걷는 동안 그 데크를 차지했다 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나는 딸을 바라보면서 또 다른 데크가 있긴 한데 지금까지 걸어온 것보다 더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 괜찮아, 아빠, 더 걸어갈 수 있어"  여전히 자신감 충만한 말투로 딸이 말했다.



잠시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길은 곡선을 그리며 숲 속 저편으로 사라지는 듯 보였지만 코너를 돌면 이전과 비슷한 구부러진 길이 다시 나타났고 끝이 없는 듯 이어졌다. 길 옆으로는 낙엽송이 큰 키를 자랑하듯 쭉쭉 뻗어있었고 코너를 돌 때마다 쉽게 눈에 띄었다.






 


해는 산등성이를 넘어가 조금씩 그 빛을 잃어가는데 구부러지는 길과 낙엽송은 끝없이 나타났고, 딸과 끝말잇기를 하면서 그 지루한 풍경을 지나쳤다. 한 번 말했던 단어가 다시 나오고 어떤 단어는 이전에 언급이 되었는지 아닌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끝말잇기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서쪽 하늘에 낙조마저 사라지려고 할 즈음 또 다른 데크에 결국 도착했다. 









텐트를 치고 짐을 정리하니 사방이 어두워졌다. 근처 마을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없었다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제법 무서울 뻔했다. 이제 저녁을 먹을 시간. 배낭에서 음식을 꺼내다 이번 백패킹에서 빼먹은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오늘 저녁 주 메뉴인 라면을 놓고 온 것이다. 앗차-차!






아빠는 20 kg가 넘는 배낭을 메고, 딸은 작은 체구와 짧은 다리로 6 km 거리를 두 시간 넘게 걸어 체력이 방전이 된 상태에서 라면이 없다는 사실은 그나마 도착했다는 안도감으로 가득 차 있던 우리를 멘붕 상태로 만들었다. 한 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여러 가지 대안이 머릿속을 들락날락한 끝에 나는 랜턴을 집어 들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가 머물 데크는 등산로와 인접해 있었고, 마을과의 거리가 멀지 않은 편이었다. 한 손은 랜턴을 들고 다른 한 손은 딸의 손을 꼭 잡고 깜깜한 어둠을 뚫고 경사가 가파른 등산로를 내려갔다. 동네 마트에서 라면을 사고 다시 가파른 등산로를 오르니 식었던 등에서는 다시 땀이 솟구쳤고, 데크에 도착해서도 한 동안 거친 숨을 내뱉어야 했다. 


예상보다 먼 거리를 걸어왔고, 의도치 않은 야등까지 하느라 저녁을 먹고 나니 시간이 벌써 10시를 훌쩍 넘어가 있었다. 대충 정리를 마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여유도 없이 우리 부녀는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등산로와 인접한 데크에서 잠을 자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온 것인지 낯선 곳이라 그런 것이지 밤새 여러 번 잠에서 깼다. 그때마다 부엉이, 비둘기, 여러 새소리가 적막한 산속에 울려 퍼졌다. 아침이 되어서도 일찍부터 올라오는 등산객들은 없었고, 산속 임도는 새소리를 제외하곤 고요하기만 했다. 


자고 있는 딸을 깨운 후 귀가 준비를 마치고 어제 걸어왔던 임도를 다시 걸었다. 구부러진 길 옆으로 낙엽송이 다시 나타났다. 어제와 같은 구도였지만, 아침 햇살을 받아 따스함이 느껴지는 임도 풍경에 기분이 좋아졌다. 햇빛에 반짝이는 푸른 잎사귀들, 새들의 합창 공연, 구부러진 임도 가장자리에 설치된 빈 벤치마저 정겹게 다가왔다. 하지만 다시 그 긴 거리를 걸어 되돌아가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지도에서 본 중간 탈출로를 어렵게 찾아 단숨에 마을로 내려왔다. 








8킬로가 넘는 긴 거리를 아무런 불평 없이 걸었고, 아빠가 뭘 안 챙겨 와도 화를 내지 않았던 딸이 무척 고마웠다. 평소 같았으면 힘들어하고 짜증을 냈을 터인데, 리더십 캠프에서 뭘 배웠는지 궁금했다. 딸은 거기에서 리더가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해 배웠단다. 통솔력, 정직, 인내심, 공감능력, 등등. 아빠와 백패킹을 하는 동안 캠프에서 배운 인내심을 시험해 보고 싶었고 그 때문에 불평 없이 잘 걸을 수 있었다고. 교육의 힘은 참으로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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