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태원 빠-텐더” 랍니다
십 년이 넘는 빡빡한 직장 생활에 넌더리가 날 무렵,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지인들이 동업하는 이태원 바에서 가끔 일을 할 수 있는 ‘투잡’의 기회가 온 것이다. 회사의 월급이 부족하거나 그랬던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야근 없는 편한 직장도 결코 아니었는데, 무턱대고 (돌이켜보면, 무슨 생각이랄 것도 없이) 그냥, 그렇게 된 운명이다.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하고, 어른이 된 다음에도 종종 이런저런 시문학상 같은데 응모하는 헛된 꿈을 갖고 있었기에, 낯선 이와의 술을 나누며, 그 들의 삶을 섞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태원 빠-텐더"의 신비로운(?) 삶을 시작했다.
열두 명 정도의 의자가 있는 작은 바. 가끔 금요일 밤에는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와서 노래를 하고 간다는 이태원 꼭대기에 자리 잡은 작은 공간에는, 특별한 인테리어도 없고 ‘인스타’에 올릴 만한 ‘힙’한 구석도 없어 보였지만, 무엇인가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날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드는 가게였다. 한편으로는 내가 어설픈 바텐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이 가게의 허술한 구석(!) 역시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소설의 주인공, 셜록 홈즈 처럼 파이프 담배를 물고 나이 지긋한 노신사가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것 같은 고요한 작은 바에서는, 손님을 기다리는 시간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이 돈 못 버는 지루함(?) 덕분에 이런 글을 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자면, 아직도(?) 회사를 다니는 이른바 ‘투잡러’의 비애로서, 내가 일하는 가게를 알려드릴 수도 없고 필명으로만 글을 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난 끝까지 ‘숨어 있는 이야기꾼’ 이어야 한다. 물론,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마음 편하게 털어놓은 손님들의 사연 또한 모두 익명을 전제로 여기 공유되는 것을 허락받은 ‘은밀함’들이다.
사실 이 가게에 인연을 맺을 무렵, 마침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처럼, 그렇게 내 인생의 '바닥' 과도 같은 시기가 찾아왔었다. 나는 그동안 ‘내 생각 만으로’ 열심히 살아오며, 알게 모르게 내 주변의 가장 소중한 이들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주었다. 그 오래된 어리석음과 이기적인 삶에 대하여 충실히 속죄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불현듯 사회 부적응자의 면모를 한껏 드러내면서, 한없이 은밀하고 신비로운 곳에 스스로를 가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공간은 나에게 그러한 기회를 온전히 허락한 듯 보였다.
그러니, 이제는 나뿐만 아니라, 이 곳을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에게도, 한없이 너그럽고, 마음껏 고립적인 시간과 공간이 되어주기 바란다. 그 마음을 알아주는 ‘빠-텐더’와 함께.
바텐더로서의 시간은, 잠깐 누군가의 삶에 녹아드는 영매가 되어 보는 순간이다. 길 잃고 거리를 헤매는 어린아이의 눈물자국과도 같은, 사람들의 이런저런 지친 이야기를 데려다, 내 삶과 생각의 그늘에서 한 숨 돌리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곱게 달래 드린 후, 여기에 살짝 전해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술과 음악에 적셔둔 소중한 마음을, 사람과 사랑의 기억들을, 잊기 힘든 어떤 사람들의 눈빛들을...
먼 하늘에 풍등처럼, 띄워 보고 싶었다.
글&사진 / 이태원 빠-텐더, 이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