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산업신문> 지면에 연재하는 골프코스 평론입니다. 한국골프장경영협회 창립 50주년 기념 ‘한국골프장총람’ 편찬을 총괄하느라, 지난 1년 간 연재를 쉬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의미있고 돋보이는 골프장들을 골라, 하나하나 톺아봅니다.
문 연 지 2년 남짓이면 골프코스가 아직 만들어져가는 기간이다. 하지만 성문안은 이미, 한국 골프장 흐름에서 ‘의미 있는 문제작’으로 주목할 만한 하다.
이름과 땅의 스토리부터 독특하게 지었다. 들어가는 길 양쪽에 거대한 성문 같은 바위가 있었기에 ‘성(城)문(門) 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코스 터의 풍광 지형을 이르는 말도 고유하다. ‘버덩’과 ‘다둔(多屯)’이다.
버덩은 ‘높고 평평하며 나무는 없이 풀만 우거진 거친 들’을 뜻한다. 제주도의 ‘벵듸’와 비슷한 ‘중산간 들판’이다.
다둔은 ‘산의 둔덕에 있는 마을’이라는 옛 지명이라는데, 둔덕이 이어진 이곳 지형을 표현한 조어(造語)인 듯하다.
(골프장 측의 표현을 종합해 보면) “자연의 성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늑한 마을 너머로, 높고 평활한 둔덕의 초지 골프코스가 펼쳐진다”는 ‘별천지 서사’를 품고 있다.
성문안의 모체인 ‘오크밸리(현 HDC리조트)’도 애초에 별천지 콘셉트로 지었다. 삼성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의 장녀로 한솔그룹을 이끌던 고 이인희 고문(1928~2019)이 한국 레저 문화산업을 발전시키겠다고 선언하며 1998년 문을 열었다. 원주의 참나무숲(여의도 8배 넓이) 산골에, 대규모 골프코스(오크밸리 36홀, 오크힐스 18홀)와 9개 슬로프 스키장, 1,105실의 콘도미니엄과 휴양림, 조각공원, 예술작품 박물관 등 문화 시설을 갖춰 조성했다. 2019년 HDC그룹이 인수하여 성문안 18홀 코스와 월송리 18홀 코스를 완성하고 총 90홀의 국내 최대 골프 리조트가 되었다.
오크밸리와 성문안이 지향하는 별천지는 비슷한 듯하지만 다르다.
역사로 보면, 오크밸리는 안양컨트리클럽에서 비롯된 삼성의 골프장 문법을 잇고 있다. 한국골프장들은 구십년대 초반까지 일본 골프장들을 모방하려 했고 그 뒤로는 서구 골프코스 흐름을 따르려 애써왔다. 그것이 한국골프장들이 처한 형편이라고 안위했거나, 세계 골프의 변방에 있는 한국 골프코스가 정체성을 얻는 길이라고 여긴 듯하다.
그 본류에 삼성 가문이 있다. 한국 고급 회원제 코스의 종가라 불리는 안양컨트리클럽이 1997년 로버트 트렌트 존스 2세의 설계로 리모델링했으며, 1990년대 말에 개장한 오크밸리도 그 흐름의 중심에 섰다.
삼성 2세대의 맏이였던 이인희 고문은 로버트 트렌트 존스 2세와 잭 니클라우스 설계 브랜드와 스타일을 한국 참나무숲 계곡에 들이면서, 선대부터 이어온 삼성의 기준을 적용했다. 산중 자연 속에 서구 설계가의 도전성을 적극 반영하면서도, 안양CC에서 이어져 온 ‘깔끔한 정원형 손질’을 유지한 매니큐어드(Manicured) 코스였다.
의심할 것 없이, 한국의 거의 모든 골프장은 삼성 스타일을 교과서처럼 본받아 왔다. 오크밸리에 영향을 받았거나 그렇지 않았거나, 이후 한국 산중 코스들은 오크밸리와 비슷한 유형으로 조성되거나 비슷한 방식으로 관리됐다.
러스틱(Rustic) 코스를 표방한 극소수 선도적 골프장들도, 실제로는 거의 매니큐어드 코스에 가까웠으며, 일부 ‘비관리지역’처럼 거친 느낌이 드는 구간이 실제로는 인공 관리 기법으로 연출한, ‘지속 불가능 조경’인 경우가 많았다. 일부 다른 경향을 보인 골프장도(매립지 코스나 산중 듄스 등)도 있었으나 서구 코스 모델(링크스 등)을 실험적으로 이식한 시도였다.
(물론, 삼성 유형의 코스와 관리 스타일은 한국골프장 발전에 큰 몫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코스들이 거둔 성취는 신속하고 풍성했다)
성문안의 ‘버덩’과 ‘다둔’은 오크밸리 류의 정돈된(Manicured) ‘자연 정원형 산중 별천지’와는 다른 세계를 향하고 있다.
오크밸리가 참나무 숲속의 깔끔한 정원이라면 성문안은 둔덕(다둔)의 거친(Rustic) 버덩이다.
이 터에 톰 파지오(Tom Fazio) 설계 골프코스가 계획됐었다고 한다. 이인희 고문이 ‘한국에서 단 하나뿐인 톰 파지오 코스’를 전제로 설계를 받았는데, 실행하지 못하고 별세했다는 것이다. HDC가 이어받아 개발하면서 톰 파지오의 설계를 버리고 한국 설계가 노준택에게 재설계를 맡겨 조성했다.
기존의 오크밸리 터보다 고도가 낮아 골프코스 개발하기에는 다소 나은 자리였던 듯하다. 하지만 한국 골프 전문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는 톰 파지오의 작품들 - 섀도우크리크(Shadow Creek Golf Club, 미국 네바다)나 콩가리(Congaree Golf Club,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등처럼 ‘골프코스를 기다려온 땅’은 아니다. 계곡과 구릉의 고도차가 크고 모래 지반 없이 풍화 토심이 얕은 바위산 속이었다.
노준택은 성문안 땅속에 숨어있던 거대 암반을 불러냈다. 콩가리 골프코스가 사우스캐롤라이나 저지대의 표토 아래 퇴적 모래층을 불러내려 했듯이, 톰 파지오가 애초 설계에서 한반도 산줄기 아래 바위층을 드러내고자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국 산중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깊은 한국 코스 디자이너가 불러낸 바위들이 이 땅의 본질과 영혼에 좀 더 살갑게 다가서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골프코스는 두 갈래로 전개된다.
아웃코스 9홀은, 계곡을 바위 무더기 건천(Dry Creek)으로 재 조형하고 골짜기(Creek) 양쪽에 코스 길을 냈다. 땅속 암반을 쪼갠 바위 무더기가 은하수를 뿌려놓은 듯 빛나며 한복판에 흐른다. 양쪽 옆은 숲이지만 코스 안에 나무는 거의 없으므로, 둔덕과 버덩이 연달아 펼쳐지며 길고 넓어 보인다. 땅속에 숨어있던 거친 (Rustic) 모험 길이 드러난 듯하다.
인코스 9홀은 한국 산중 지형과 풍광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호수와 사막, 둔덕과 건천, 계곡의 숲길을 극적으로 조합해 넣었다. 9홀 구성에서 이렇게 다양한 시각 경험과 도전이 전개되는 코스는 드물다. 그런 변화로움 가운데서도 전체 흐름의 일관성을 도도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코스에는 설계자의 의욕이 돋보이는 홀들이 많다. 그중에서 자연이 꿈틀대며 싸움을 걸어오는 홀들이 먼저 다가온다.
2번 파4 홀(350m)은 높은 언덕을 향해 꿈틀꿈틀하며 치고 오른다. 짧은 홀이지만 페어웨이에는 좌에서 우로 가파른 경사가 흐르므로, 티샷을 정확한 랜딩 타깃에 보내지 않으면 공이 오른쪽으로 흘러내린다. 이때 세컨드샷으로 높은 언덕 위(Plateau) 그린 위에 공을 세우려면 위협적인 군집 벙커(Cluster Bunker)를 높은 탄도로 넘겨야 한다. 티잉 구역에서 잘 보이지 않지만, 이 홀은 그린 오른쪽 앞에 또 하나의 페어웨이가 있다. 장타자는 오른쪽 페어웨이를 향해 지름길로 도전할 수도 있는데 그쪽 페어웨이가 나무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키 큰 교목을 낮은 관목으로 대체하면 제2의 페어웨이가 더 잘 보이면서 훨씬 유혹적일 듯하다) 가파른 오르막 지형의 단점을 다이내믹한 전략 조형으로 장점화 한 홀이다. 설계자가 설정한 홀 이름은 ‘Hill’이다.
4번 파5 홀(520m)은 긴 실개천(Creek)이 티잉 구역부터 그린 뒤쪽까지 이어진다. 건천 오른쪽으로 페어웨이가 역동적인 언듈레이션으로 꿈틀거리며 오르막으로 전개되다가, 어프로치 지점에서 건천이 페어웨이와 그린 사이를 가로지른다. 티샷과 세컨드샷, 어프로치샷 모두 타겟을 명확하게 설정하고 결단력 있게 쳐야 하는 홀이다. 골퍼마다 다른 전략으로 플레이하면서 생명감 넘치는 골짜기와 대결한다. 변수가 많아 일반 골퍼는 물론 프로 선수들도 실수하기 쉬우며, 경기 초반의 플레이 분위기를 뒤흔들기 쉬운 승부처다.
16번 파5 홀(526m) 티잉 구역에 서면 협곡 아래 티샷 낙하지점 페어웨이가 반쯤만 보인다. 장타자는 왼쪽 숲 너머 보이지 않은 랜딩존을 가늠하며 티샷한다. 페어웨이로 내려와 보면 실개천을 따라 S자로 휘어지는 홀 구조와 함께, 레이업샷 타겟 지점과 2온 시도를 도발하는 그린이 선택지를 내보이고 있다. 홀 모양이 거대 생물체가 뒤척이는 느낌이라고 생각하며 라운드했는데, 나중에 설계자가 설정한 홀 이름을 보니 ‘Blue Dragon’이었다. 한국 깊은 산중의 역동적 생명감을 잘 살린 홀이다.
11번 파4 홀(365m)도 자연 지형 조건을 살려 조성했다. 화이트티에서 315미터로 짧은 편이지만 티잉 구역에서 계곡 너머 랜딩존 지형을 상상하며 쳐야 하고, 낙하지점이 내리막이며 그린은 솟은 모양의 가로형(정면에 깊은 가드 벙커)이라 전략 선택과 샷 구사 능력을 시험한다. 한눈에 드러나지 않지만 알수록 묘미가 있는 홀이다.
12번 파3 홀(178m)은 깊은 산중 계곡에 커다란 호수를 만들고, 그 위에 동그란 아일랜드 그린을 띄워 놓았다. 높은 언덕의 티잉 구역에서 20~24미터 아래 섬을 향해 내리꽂듯 티샷하는데, 계곡과 물 때문에 바람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다. 그린이 큰 편인데 주변 공간이 좁아 작아 보인다. 단순한 원형에 가까운 그린이, 이 홀에 뒤편 호수를 사선으로 질러가는 파4 홀 페어웨이와 기하 도형처럼 연결되며 어울린다. 이 홀을 피트 다이(Pete Dye) 설계 코스 아일랜드 홀과 견주는 이도 있지만, 높은 곳에서 전체를 조감(Bird eye view)할 수 있는, 한국 산중 코스 아일랜드 홀 특유의 맛을 내고 있다. 라운드한 골퍼들이 인상적으로 기억하며, 사진을 찍는 홀이다.
9번 파5 홀(500m) 티잉 구역에 서면, 호수를 따라 휘어지는 절벽 위의 페어웨이, 그리고 그 너머 강렬한 암반이 눈을 사로잡는다. 그린은 오르막 절벽의 가장 높은 언덕 끝에 있다. 이 코스의 시그니처 뷰로 꼽히는 인상적인 홀이다. 홀의 모양 구성이 미국 캘리포니아 페블비치골프링크스 6번 파5 홀의 오마쥬로 보이기도 하는데, 해안이 아닌 깊은 산중에 이렇듯 드라마틱한 링크스 분위기와 클리프탑 홀을 빚어낸 공력이 두드러져 보인다. 인간의 상상과 기술은 바다가 아닌 바위 산중에도 이런 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14번 파4 홀(420m)은 가장 어렵다. 긴 오르막이며 페어웨이 왼쪽으로 티샷을 보내야 그린 공략 각도가 열린다. 그런데 왼쪽은(티잉 구역부터 그린 뒤까지) 페어웨이보다 훨씬 넓은 웨이스트 벙커(Waste Bunker) 지대다. 산중에 사막을 들여놓은 듯한 웨이스트 벙커에 드문드문 바위덩어리들이 떠내려온 듯 놓여 있다. 이 벙커는 코스 곳곳에 흐르는 바위 무더기 건천과 어울리며 이국적인 시각 경험을 제공한다. 웨이스트 벙커에서 플레이하는 경험도 할 수 있다(일반 골퍼들에게 너무 어려운 홀이기 때문인지 무벌타 드롭 로컬룰을 적용하기도 한다) 푸른 숲과 녹색 잔디 일색의 한국 산중 코스에서 다른 색감과 질감을 도입해 보려는 노력은 몇몇 설계자들에 의해 드물게 시도되어 왔다. 이 홀이 그중 가장 실험적인 시도 아닌가 싶다. 다만 모래 면이 경사지여서 장마철에 어떻게 유지될지 지속적인 관찰과 보완이 필요할 듯하다.
15번 파3 홀(160m)에 설계자는 ‘Reda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성의 V자형 돌출 요새를 뜻하는 이 말은 스코틀랜드 노스버윅(North Berwick) 골프클럽의 웨스트코스 15번 파3 홀 이름으로 유명해지면서 파3 홀 형태 중 하나를 말하는 용어가 되었다. 이 홀은 노스버윅의 리단과는 사뭇 다른 모양이지만 그린 왼쪽 앞에 둔덕이, 전면에 벙커가 있으며 그린 뒤는 내리막에 낭떠러지라는 특성을 띤다. 리단이든 아니든, 그린 왼쪽 바위 면을 강조했으면 더 인상적일 것 같은데, 아마도 이 코스의 ‘다둔’과 ‘버덩’ 콘셉트를 살리려 거친 둔덕 느낌으로 마감한 듯하다.
7번 파4 홀(440m)도 코스의 콘셉트를 시원하게 드러낸다. 활주로처럼 직선으로 쭉 뻗은 페어웨이 양쪽으로 대칭형의 벙커들이 날개를 펼치듯 놓여 있다. ‘멀리, 똑바로’ 치는 홀이다.
페어웨이 옆 공간을 나무 한 그루 없는 둔덕, 버덩으로 처리하여 개방감을 강조한 이런 홀들이 한국 산중의 기존 골프장들과 완연히 다른 코스로 보이게 한다. 플레이어빌리티도 높아지고 감각적 다양성을 느낄 수 있으며, 홀들이 실제보다 더 넓어 보인다.
이 터의 주인은 바위 아닐까 싶다. 9번 홀 페어웨이 너머의 거대 바위는 ‘노두(露頭)’ 또는 ‘암반’이라고 표현하면 불경스럽다고 느껴질 만큼 장엄한 모습이다.
이 일대의 바위들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기반암이다. 대략 20억 년 전 원생대에 형성되었고, 1억 8천만~1억 2천만 년 전쯤 중생대에 대보조산운동의 변성을 거쳤으며, 약 2,300만 년 전 전후의 경동성요곡운동으로 융기한 화강(편마)암 층이다. 성문안 터의 화강편마암은 땅속을 장려하게 흐르던 맥이 돌연 잠에서 깬 듯 순정한 빛을 띤다.
특히 9번 파5홀 페어웨이 너머 언덕은 거대 암반 그 자체다. 이 자리에 6성급 호텔과 주거 공간이 들어설 것이라고 하며 바위의 맥동은 그대로 골프장 클럽하우스로 연장된다. 클럽하우스 지붕은 리조트 1층 바위 표면과 연결되어 루프탑 정원이 된다.
코스를 따라서 오크밸리 단지 전체로 연결되는 40km 트레킹 구간 ‘다둔길’도 조성했다.
톰 파지오 설계를 버린 까닭이 무엇인지도 골프 전문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세계에서 이름값이 가장 높고, 한국 골프코스 전문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톰 파지오의 설계 코스가 한국에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이들이 있다. 톰 파지오는 경사도가 3% 이내여야 설계한다는 조건을 붙였고, 그 설계를 그대로 따르면 토공량이 엄청나 실시 설계 인허가를 받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한국에는 이런 산중에서 골프장을 만든다. 산을 깎아내고 암반을 깨부수는 일은 흔하되, 자연의 원래 흐름은 보존하거나 되살리려는 과제와 만나고 고뇌하면서, 산중 코스 길을 찾아내 왔다.
지금은 희게 빛나는 바위틈으로, 시간이 흐르며 풀이 자라고 바위 색은 점점 변할 것이다. 노을 아래 황금빛으로 빛나는 모습이 될지, 풀에 덮여 피복 사구 같은 느낌으로 변할지, 새로 들어서는 호텔 주거시설과 어떻게 어울릴지······ 마음의 눈으로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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