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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론의꽃 Nov 05. 2021

생활의 영재

영재는 끊임없이 배우면서 자란다. 

아이가 두 돌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숫자를 읽었다.

'엄마 저건 7이야. 7이 두 개니까 77이고 앞에 1이 있으면 17이야.' 

깜짝 놀란 나는 ‘누구한테 배웠어?’ 했더니 ‘그냥 알아’라고 했다.

겨우 3살인 아이가 그냥 알아 라는 사고를 한다는 게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애가 숫자를 좋아하나?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간판들을 읽었다. 

'엄마 저건 가방의 가지? 나무의 나지?' 

한글도 '그냥 알아' 라는 아이의 말에 나는 설마 얘가 영재인가?라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배우지 않아도 그냥 아는 아이를 가리켜 영재라고 하지 않나. 

세상 대부분 엄마의 착각이 ‘내가 영재를 낳았나?’ 라고는 하지만 나는 영재 엄마가 될 자신이 1도 없었다. 

영재야말로 엄마의 전적인 헌신을 먹고 자란다고 믿었던 나는 그저, 아이가 평범하게만 자라기를 바랐다. 


그런데 아이는 자라면서 예체능에도 재능을 보였다. 

전국 어린이 사생대회에서는 최연소 대상 수상자가 되기도 했었다.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아이를 지도하고 싶다고 했지만,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할까? 생각뿐이었던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믿고 싶었다. 

한글이나 숫자처럼 그림도 배우지 않아도 그냥 알아서 잘 그려주지 않을까? 


악기는 한 번 듣고 금세 익혔고, 자전거는 한번 넘어지지 않고 배웠고, 수영은 옆에서 누가 하는 것을 유심히 보더니 자유형을 해냈다. 

사람들은 얘가 뭘 해도 될 아이이니 어릴 때부터 뭔가를 가르치라고 했지만, 

당시 불량품 잘 내던 해고 직전의 똥 손 미싱공이었던 나는 먹고사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아이의 재능이 활짝 꽃 피울 수 있을 만큼 뒷바라지를 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의 재능을 외면하고, 어떤 수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가 그냥 알아 갔으면 싶었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지극히 평범하게만 자라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이는 평범의 기준선 아래로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세 살에 한글을 읽은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더니 받아쓰기를 힘들어했고, 

그렇게 책을 읽었던 아이가  글자가 싫다고 했다. 

이도 모자라 숫자를 갖고 놀던 아이가 중학교에 가서는 수포자가 되었다. 

아이가 그린 그림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고, 자전거나 수영뿐 아니라 운동 자체를 싫어했다. 

중학교 때 아이의 성적표를 보고 난 그제야 '그냥 알게된 아이의 재능' 을 믿고, 학원 하나 보내주지 않은 미안함과 후회로 혀를 깨물고 싶었다.     

어느 순간인지 모르겠지만 아이는 공부에 흥미를 잃었던 것인데, 그게 언제인지를 내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는 처음부터 공부에 흥미가 있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 모든 게 나 때문인 것 같았지만, 자책하고 후회하기엔, 아이와 내가 살아가야 할 날이 창창했다. 

차라리 아이가 흥미를 갖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문제는 아이가 공부 외 모든 것에 흥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어느 날은 나의  디카로 매일같이 수백 장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작가 지인은 아이의 사진을 보고 ‘얘 카메라 한 대 사줘라. 구도와 색감이 심상치 않아. 주제도 있고.’라며 극찬을 했다. 이에 나도 그럴까? 했는데, 어느 순간, 흥미를 잃었는지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았다. 

대신 식음을 전폐하고 일본 드라마를 보더니 자막 없이 일본 드라마를 보는 게 아닌가? 

잘됐다. 이번에는 미국 드라마를 봐서 영어 공부를 했으면 좋겠는데, 

어느 날부터는 매일같이 자신만의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서 퇴근하고 돌아오는 나에게 맛 보였다. 

그런데 그 솜씨가 거의 수준급이었다. 어떻게 배웠어? 했더니 어떻게 하다 보니까…. 였다.

얘가 요리사가 되려나 싶었는데, 그도 잠시 이번에는 세탁과 청소 다림질에 관심을 보였다.  

아이는 자신의 교복뿐 아니라 나의 셔츠도 칼같이 다리고, 창틀 사이사이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청소도 해냈다. 

이런 아이의 모습에, 친구가 그랬다. 너희 아이는 생활의 영재구나.     

 


공부에 흥미를 잃은 것 빼고는 문제 될 게 없어 보였지만, 

바닥까지 내려간 성적으로 갈만한 고등학교가 없었다.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뭐 특별히 하고 싶은 거 없어?"

"하고 싶은 거?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게 하고 싶은 건데?"

"말고 꿈 말이야. 꿈. 판사. 변호사. 의사 같은 꿈"

"그건 직업이지. 꿈은 좀 달라야 되는 거 아냐?"

"어쨌든 꿈 없어?"

"꿈이 꼭 있어야 돼? 난 나답게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게 꿈인데? 지금 난 나다움을 찾는 중이야."

"정말 되고 싶은 게 없단 말이야?"

"난 내가 될 거야. 뭐가 더 되어야 하는데?"      


나의 걱정과 불안감이 무안할 정도로 아이는 자신의 삶에 확신에 차 있었다. 

난 더 이상 공부 잘하는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것에 미련을 버렸다. 

굳이 보낼 고등학교가 없으면 안 보내면 되지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예고에 가고 싶다고 했다. 

‘뭐? 전국 꼴등의 성적으로? 전공도 없이?’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예의상 물어봐줬다. 


"예고에 문예창작과 라는 게 있더라고. 나 거기 가볼까 한데, 괜찮겠어?"


아이가 너무 천연덕스럽게 물어오길래 나는 마치 오랫동안 아이가 나 몰래 따로 예고를 준비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지금까지의 성적은 어쩌면 우리를 속이기 위함이었나?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난 별 기대감도 없이 ‘그래 한번 해봐라’ 싶었는데, 

어라? 아이는 예고에 보란 듯이 합격했다. 

어머나 세상에. 전국 꼴등이 예고를? 역시, 넌 다 계획이 있었구나. 기쁨과 기대가 채 가시기도 전, 

아이는 다녀보니 적성에 맞지 않다면서 입학 3개월 만에 자퇴를 해버렸다. 

아이를 예고생으로 졸업시키기 위해 별 잔소리, 협박을 다 했지만, 

아이는 이번에는 음악이 하고 싶다고 했다. 

집시처럼 유랑하는 아이의 흥미찾기를 보다가 진이 빠진 나는 알아서 하라며 단념했다. 


"안그래도 나 알아서 하려고 했어. 언제나 그랬잖아"

면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음악 학원에 다니더니 버스킹 공연을 하고 다녔다. 


그 뒤 아이는 우스운(!!) 성적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실용음악과로 대학에 지원했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다. 

하지만 아이는 실망하지 않고 '학자금 대출 빚 갚는 인생 되지 않겠다'며, 

나 보고도 빚내서 대학 보낼 계획은 세우지 말라고 나를 위안(?)하면서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그렇게 20살이 된 아이는, 여기저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신의 생활비는 물론이고 가끔씩 나에게 용돈도 챙겨주면서 어른이 되어갔다. 

언제나 아르바이트를 하나?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아이는 알아서 할 것임을 믿었다. 

몇년을 아르바이를 했나?

'이제는 4대 보험이 되는 직장에 다녀야 하겠다' 고 하더니 입시 학원의 실장으로 취직을 했다. 


"고졸인데 괜찮았어? 거기는 학벌 안 봐?"

"학벌 안 본다고 하긴 하던데 고졸 지원자는 나 혼자이긴 했어"

  

아이는 지금 학원에서 포토샵. 홈페이지 관리. 학부형 상담. 학생들 관리. 교사들 멘토 등. 

생활의 영재다운 면모를 보이면서 자신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오늘도 나는 딸을 찾는다. 

'딸, 전등 나갔다.'  

'알았어. 전등만 사다 놔. 내가 퇴근하고 갈게.' 

'딸, 세면대에 물이 안 내려가네.' 

'알았어. 내가 퇴근하고 한 번 볼게.' 

'딸, 선풍기 고장 났네. 버리고 새로 살까?'

'냅둬 내가 한 번 볼게'

      

그냥 알게 된 것들은 그냥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그냥 알았기에 가치도 알 수 없다. 

우리 인생에 그냥 알게 되는 것들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알게 된 한글. 숫자 영재였던 아이는 

이제 생활의 영재가 되어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묵묵히 배워가며 성장하는 중이다. 

나 역시 그런 아이를 보면서 배우고 자라고 있기는 마찬가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는 게 인생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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