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차올라야 고갤 드는 느림보탱이 인생아
확신의 순간.
그러고 보면 늘 확신이 필요했다. 마음이 차올라야 결단을 내리곤 했다.
원하는 마음으로 가득해진 순간 발걸음을 떼었고, 본격적으로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어느덧 마음속에 날아든 '그것'에 대해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하다 꼭 해야겠다 싶은 확신의 타이밍에 움직여야 추진력도 내적 동기도 발휘됐다.
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야 연락을 하고 만나자고 말을 했다. 상대를 향한 좋아함이 가득 차야 말로도, 행동으로도 표현되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항상 가득 유지되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말과 행동에 애정, 관심이 배어났다.
싫은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싫은 마음으로 가득 차야 그 연의 종지부를 찍곤 했다. 싫어하는 마음이 차오르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에게 품는 기대가 완전히 바닥나야 가능한 것 같았다. 상대에 대한 모든 마음과 기대가 끝나면 냉담하게 돌아섰다. 그렇게 내려진 결정은 돌이켜진 적 없었다. 애당초 누군가에게 그다지 많은 기대를 품지 않는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자연히 그에게 건 기대가 커진다는 뜻이었고, 누군가가 싫어진다면 많지 않던 기대마저 소진되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났을 때는 그 싫음이 끝을 볼 때까지, 그에 대한 모든 기대가 사그라져 상대를 잃어도 상관없을 때까지 관계를 지속했다.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나는 나름대로의 노력을 해본다. 에둘러서 몇 번, 직접적으로도 몇 번 속마음을 표현한다. 그럼에도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서로 노력하는 것을 느낄 수 없어 마침내 모든 것이 바닥났을 무렵, 나는 미련 없이 그 손을 놓았다.
그러니까 확신이 필요했던 게 맞다. 필요하다는 확신, 하고 싶다는 확신, 내가 이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할 확신, 내가 이 사람을 떠나보낼 확신. 마음이 차오를 때까지 자분자분 가늠해 보고, 그것이 확실시되었을 때 결단을 내린다. 그것이 원하는 것이든, 필요한 것이든, 관계든, 노력이든. 심지어 물건을 살 때도 그러하니, 꿈, 진로, 인간관계에서의 마음은 오죽했으랴.
조금만 마음이 움직여도, 약간의 필요성만으로도 손을 뻗어 그것이 내게 오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점차 그 마음이 차오를 때까지, 가득해질 때까지를 기다린다. 이러니 때로는 스스로를 답답하게 여기는 게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인지 삶의 많은 순간에서 빨리 가늠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좋다 싫다 못한다 판단도 빠르고 취사선택도 빠른 그들을 보고 있자면, 효율을 최선으로 여기는 이 시대에 살기 참 편리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빠르게 판단하여 결정하고, 결정한 것에 대해서도 좋은지, 싫은지, 할만한지, 도저히 못하겠는지 빠르게 결론 내린다. 누가 좋아지고 싫어지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시간 낭비를 하거나, 에너지 낭비를 할 일은 없어 보인다. 그런 그들을 보고 있자면, 한정된 에너지와 시간 안에서 많은 것들을 놓치지 않고 잘 사는 것만 같았다. 그런 삶이 훨씬 영리해 보였다고나 할까.
그에 비해 나는 선험적인 지식에 따라 기준선이 명확한 것들은 빠르게 결정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자꾸만 더 신중해지곤 한다. 사안이 중차대하다고 느끼는 것들은 더 그렇다. 주변사람들에게 '내가 엉덩이가 좀 무겁다'라고 말하곤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다. 빠르게 변화하고 빠르게 선택하고 소비되는 시대에 내 결정에는 늘 어느 정도의 시간과 고민하는 에너지가 확보되어야만 했다.
민폐가 되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성격 덕에 기한 임박까지 미련 떠는 일은 절대 없고 늘 문제가 생길 것을 대비하여 여유 기간을 두고 모든 것을 마무리하는 편이지만, 기한 내에서도 빠르게 판단되면 될수록 좋은 일들에 대해서는 이따금 스스로가 답답해지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채근하는 일이 허다했다.
재미있게도 이러한 답답함이 계속되면 지극히 개인적인 일에서는 급작스럽게 무언가를 결정해버리기도 한다. 생각의 꼬리를 의도적으로 잘라버리고 충동적인 결정을 해버리는 것이다. 다행히 결과는 의외로 만족스럽기도 하고 소소한 문제가 생기기도 하는데, 장고 끝에 타이밍을 놓치거나 좋은 결정을 하지 못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다. 아니, 선택했다기보다는 속 터짐에 의해 선택된 방법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길게 고민한다고 매번 탈 없는 결정만 할 수 있으랴. 시간이라도 아끼자는 측면에서 시도해 본 방법이 의외로 요긴하게 쓰인다. 알 수 없는 해방감은 덤이다. 그래서 요즘은 개인적인 부분에서는 자주 생각의 꼬리를 끊어내고 있다.
앞선 내용만 읽으면 거의 대부분 확신을 기다리며 고민 속에 살아온 것 같지만, 인간이란 참 모순적이어서 상충하는 면이 존재한다. 평생을 데리고 산 나지만 정말 알 수가 없다. 글로 기록하다 보면 그것이 더욱 자명하게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