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의 라이벌 3] 메디치 vs. 반 메디치 가문 파치 2
1476년 12월 26일, 성 스테파노 축일에 밀라노 대성당에서 밀라노 군주 갈레아초가 반대파들에게 살해당한다. 삼각 동맹의 한 축이 무너진 것이다.
이는 음모자들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약해졌다고 해도 메디치는 아직 피렌체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정부 주요 관리들 중에는 메디치에 충성하는 인물들이 다수 있었다. 때문에 메디치를 축출하는 것은 사실상의 쿠데타였다.
음모를 꾸미는 자들
1477년 12월 음모의 주역들이 모여 최종 계획을 논의했다. 먼저 당시 파치 가문의 수장이었던 야코포(Jacopo di Messer Andrea de' Pazzi, 1421-1478)가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계획에 참여하길 주저했다. 하지만 나중에 교황이 계획을 승인하자 마음을 바꿨다.
또 한 명의 파치는 야코포의 조카인 프란체스코(Francesco de' Pazzi, 1444 -1478)였다. 사실 처음에는 메디치를 죽이지 말고 피렌체에서 추방하는 방법이 논의되었다. 하지만 프란체스코는 반드시 메디치 형제를 죽여야만 한다고 밀어붙였다. 그리고 교황의 용병 대장인 몬테세코도 합세했다.
여기에 피사 대주교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리아리오(Francesco Salviati Riario, 1443-1478)와 교황의 조카인 리올라모 리아리오가 있었다. 이 둘은 교황에게 이번 계획의 승인을 받아낸다. 이때 교황은 훗날 비판을 피하기 위해 살인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며 우회적으로 승인한다.
우회적 승인이란 자신의 조카 손자인 추기경 라파엘레(Raffaele Sansoni Galeoti Riario, 1461–1521)를 교황의 사절로 임명하여 피렌체로 파견하는 것이다. 사실 피사 대학에 다니던 17살의 라파엘레는 음모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하지만 그의 역할은 이번 음모의 핵심이었다.
먼저 라파엘레 추기경이 교황의 사절로 피렌체를 방문할 때 무장 병력들은 추기경의 수행원으로 변장해 피렌체로 잠입한다. 그리고 당연히 로렌초는 추기경을 초대해 만찬을 열 것이다. 이때 수행원으로 변장한 암살자들이 로렌초와 줄리아노를 한 번에 살해한다.
그리고 야코포와 살비아티가 병사들을 이끌고 시정부를 장악하면 평소 메디치에 반대하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봉기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몬테세코가 피렌체 성벽 밖에 준비해 둔 용병 부대가 진격해서 피렌체를 점령하는 계획이었다. 모든 것이 라파엘레가 교황의 사절로 피렌체를 방문해야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 있었다.
1478년 4월 19일, 조금씩 틀어지는 계획
계획은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작지만 중요한 부분이 조금씩 틀어졌다. 추기경은 피렌체에 도착했고 로렌초는 그를 자신의 별장으로 초대했다. 하지만 줄리아노는 몸이 아파 연회에 불참한다. 피렌체를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해서는 두 형제를 동시에 처치해야만 했기에 결국 계획은 급하게 수정되었다.
음모자들은 일주일 뒤 부활절 미사로 시간을 조정했다. 추기경이 미사를 집전할 예정이라 두 형제가 모두 참석할 것이다. 그런데 또 문제가 발생했다.
직접 암살을 맡은 몬테세코가 성전에서는 살인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발을 뺀 것이다. 사실 그는 이전부터 다른 사람에 비해 음모에 미온적이었다. 결국 두 명의 수도사가 암살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칼 쓰는 법을 배운 적 없는 그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우려되었고 이는 현실이 되었다.
1478년 4월 26일, 부활절의 피
부활절 아침, 사람들이 대성당으로 모였다. 로렌초를 비롯한 귀족들과 살비아티 대주교는 앞자리에 앉았다. 줄리아노는 여전히 몸이 아픈지 도착하지 않았다. 음모자들은 또 계획이 틀어질까 불안했다.
결국 프란체스코가 다른 동료와 함께 메디치 저택으로 줄리아노를 데리러 갔다. 그리고 로렌초가 데리고 오라고 했다며 거짓말을 한다. 당시 마키아벨리가 훗날 이 장면에 대해 기록을 남긴다.
그에 따르면, 이들은 줄리아노를 데리고 오면서 포옹을 하거나 툭툭 치며 장난을 쳤다. 하지만 이는 친근감의 표현이 아니라 줄리아노가 속에 갑옷을 입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다행히 갑옷은 없었고 프란체스코는 안심했다. 성당에 도착한 줄리아노는 로렌초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엄숙한 가운데 성가가 울려 퍼졌고 미사는 마지막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암살자들은 서서히 로렌초와 줄리아노에게 다가갔다.
미사의 마지막 순간, 첫 번째 암살자가 품에서 칼을 꺼내 줄리아노의 가슴을 찔렀다. 피가 솟구쳤고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뒤이어 프란체스코가 줄리아노를 찔렀다. 줄리아노가 쓰러졌지만 프란체스코는 멈추지 않았다. 프란체스코의 증오가 얼마나 컸는지 줄리아노는 칼에 19번이나 찔렸다고 한다.
비명을 들은 로렌초가 돌아보았지만 그에게도 공격이 들어왔다. 하지만 전문적인 칼잡이가 아닌 수도사의 공격은 로렌초의 귀를 살짝 스쳤다. 다음 공격이 이어졌지만 곧 로렌초의 호위병과 친구들이 암살자를 막아섰다. 로렌초는 동료들에 둘러싸여 적들을 피해 성물 안치소로 들어가 문을 잠근다.
한편 이성을 잃은 프란체스코는 쓰러진 줄리아노를 향해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다가 자신의 허벅지를 찌르고 만다. 그제야 정신이 든 프란체스코는 황급히 빠져나가려 한다. 계획대로라면 그는 시청사 접수에 합류해야 했지만 상처가 너무 깊었다. 그래서 그는 파치 저택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로렌초를 죽이지는 못했지만 정부를 장악한다면 아직 희망은 있었다.
시청사 접수 작전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지도자 제거와 함께 국가 주요 시설과 기능도 동시에 장악해야 한다. 조금 일찍 성당을 빠져나온 살비아티는 30여 명의 병력을 데리고 시청사가 있는 시뇨리아 광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야코포 역시 성당에서 나와 다른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을 이끌고 시청사로 이동했다.
시청사인 팔라초 베키오에 도착한 살비아티는 병력을 1층에 놔두고 일부만 데리고 위로 올라갔다. 남은 병사들은 위병들을 제압한 후 올라올 예정이었다. 살비아티는 교황의 전갈을 가져왔다며 정부 수반인 페트루치를 만난다. 그리고 이런저런 말로 시간을 끌었지만 1층의 병력은 올라오지 않았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페트루치가 경비병을 불렀고 살비아티는 도망치려 했지만 곧 붙잡힌다.
그런데 1층의 병사들이 올라오지 않은 이유가 황당했다. 청사의 내부는 꽤 복잡해서 처음 오면 방향을 잃기 쉬웠다. 살비아티의 병사들도 길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문서 보관소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마 마지막에 들어온 병사가 문을 닫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뿔싸, 그 문은 밖에서만 열 수 있었다. 결국 그들은 칼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스스로 갇혀 버린 꼴이 된 것이다.
한편 최대 100명에 달하는 야코포의 병력이 시뇨리아 광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동 중에 '인민과 자유'를 외쳤다. 이는 독재에 맞서기를 촉구하는 전통적인 구호였다. 그래서 시민들이 동조하며 봉기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동조하는 시민들은 소수였고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시뇨리아 광장에서 혁명을 선포하고 시민들의 반 메디치 봉기를 선동해야 했다. 하지만 살비아티가 청사 장악에 실패했기 때문에 시청사 위병들의 저항에 부딪힌다. 그리고 청사 종탑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이는 국가의 위급상황을 알리는 경보였다.
이 경보는 봉화처럼 계속 연결되어 겨우 두어 시간 만에 토스카나 전역으로 퍼지게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이 경보가 울린다는 것은 정부가 여전히 정상적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종소리를 들은 야코포는 자신들이 실패했다는 것을 실감하고 황급히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쿠데타는 실패했다. 하지만 '피의 4월(April Blood)'로 불리게 될 광란의 살육은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 그리고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시민들이 메디치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된다.
* 다음 편에 계속 이어집니다.
<참고자료>
라우로 마르티네스, <메디치 살인사건의 재구성>, 김기협 옮김, 푸른역사
팀 팍스, <메디치 머니>, 황소연 옮김, 청림출판
G.F.영, <메디치>, 이길상 옮김, 현대지성
마테오 스트루쿨, <권력의 가문 메디치2>, 이현경 옮김, 메디치미디어
김태권, <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한겨레출판
김경희, <마키아벨리>, 아르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