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0m 고산지대에서 살고있는 “페루 야나오까 하늘마을” 사람들 이야기
인생을 바꿔놓은 첫 만남
인도 해외봉사. 그리고 아프리카 해외봉사.
1년으로 계획했던 우리의 신혼여행 세계일주 중 5할은 우리의 신혼 봉사이다.
대미를 장식할 남미에서의 해외봉사가 남아있던 시점의 일이다.
그중 페루 시골마을에서 생계유지가 힘든 가정을 위주로 아이들을 위탁받는 학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아이들의 창의성 수업을 위해 외부 강사를 필요로 하지만 워낙 고산 지대라 들어갈 수 있는 교통시설이 없고, 분지 지형이다 보니 번개가 심하게 쳐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지 않는 산꼭대기 마을. 외부 강사가 오기에 역부족인 열악한 상황이라는 이야기도.
해발고도 4천 미터의 하늘마을.
그곳에서 홀로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한국인. 그레고리오 신부님이 계신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리가 과연 도울 수 있는 게 있을까..? 괜히 민폐만 끼치고 돌아오는 게 아닐까?
조심스러웠다. 봉사하려는 부부가 있다는 말에 우리가 있는 시내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신부님.
추적추적 내리는 빗길을 뚫고 우리는 만났다.
수수한 차림에 걸걸한 목소리를 지닌 그레고리오 신부님.
안녕하세요. 그냥 편하게 생각하세요
허허허..
낯선 환경에서 생활한 지 오래된 탓일까.
새로운 환경에 항상 경계하고 낯을 가리던 우리였는데,
신부님의 소탈함과 털털한 웃음소리 한 번에
우리는 모든 경계를 내려놓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늘마을로 향하는 구부진 산길이 두근두근 설레어 보는 건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잉카 문명이 살아 숨 쉬는 하늘마을. 야나오까
페루 쿠스코 시내에서 자동차를 타고 3시간.
두 개의 산을 넘고 4000m 해발고도까지 올라가야 보이는 곳.
분지지형에 고인 드넓은 호수 4개를 지나쳐야 비로소 야나오까라는 하늘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구비 구비 구부러져 들어가는 산길에 흔하게 보이는 광경이 있으니,
드넓은 평원에서 뛰노는 양 떼. 고도가 높아질수록 알파카 떼와 라마 떼가 보인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야나오까 마을로 가는 길에 몇 개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모자와 의상의 색깔로 마을 부족을 나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착용한 모자와 의상이 마을별로 다르다.
이는 잉카 문명부터 전해오던 마을의 풍습인데 부족(마을)끼리 모자를 통일해 멀리에서도 우리 부족인지 알아볼 수 있게 함이라 했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잉카 문명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이 산골 마을은 잉카 문명 그대로 계승되어 전해지고 있었다. 언어도 스페인어를 쓰지 않고 케추아어(잉카 언어)를 쓰고 있었다.
야나오까 하늘마을의 모자는 카우보이 같은 느낌에 짙은 갈색 빛의 모자였고,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 모두 같은 모자를 쓰고 있으니 야나오까 부족이구나? 단번에 소속감을 느낀다.
어린아이부터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까지 모두 양갈래로 땋은 머리에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봉긋한 치마를 두르고 있으니 패셔니스타가 따로 없다. 이 작은 마을에 동양인 부부가 왔다는 것은 마을 주민 모두가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6년째 이 마을을 섬기는 신부님과 우리 부부만이 이 곳에서 모자와 의상을 착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가 우리를 쳐다본다. 신기한 듯 빤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오히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우리만 이질적이다. 우리가 그들이 신기하듯, 이방인이 처음이라 그런지 유독 그들의 시선이 길게 느껴진다. 눈이 마주치면 건치를 드러내며 활짝 웃어주신다. 이 마을.. 이 순수함.. 뭘까. 정감이 간다. 좀 더 생활하면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유독 첫인상이 짙다. 그런데, 그 느낌이 싫지 않다.
처음 마주한 사람의 온도, 시선, 냄새가 기대되어지는 건 세계일주 중 처음이었다.
하늘마을에 들어서기 전 준비가 필요해
6년째 이 마을에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고 계시는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리는 신부님 덕분에 하늘마을. 야나오까에서 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신부님을 만난 날은 월요일. 신부님의 일주일 중 유일한 휴일 날. 우리는 첫 만남에 서둘러 대형마트로 향했다.
시내에 나올 수 있는 유일한 휴일이기 때문에 월요일은 일주일 치 장을 보는 날이라고 하셨다.
요 근래 페루엔 잦은 번개가 들이친다고 하셨다. 번개가 한번 내리치면 경작물 피해뿐만 아니라, 동물과 사람이 바로 죽는다고 한다. 산 꼭대기에 위치한 이 마을의 지형이 분지 지형으로 움푹 파여 있기 때문에 번개가 치면 꼼짝달싹 하지 못하고 바로 즉시 사망 이라고 한다. 얼마나 무섭게 말씀하시던지. 오금이 저려왔다. 우리가 머무는 기간 동안에 우리에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귀담아 들었다. 얼마 전 갑자기 들이친 번개에 대비하지 못해 바로 즉사했다는 모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우리에게도 예외가 없다. 혹시나 번개를 맞는다면 나무에 숨지 말기. 건물 안에 들어가기. 등. 다양하게 일러 주셨다. 번개를 대비할 장치들을 사 주셨고, 일주일 동안 먹을 식량을 함께 준비했다. 특히 신부님은 시내에 나올 때마다 꼭 연어를 한가득 사 가신다고 하셨다. 오늘은 특별히 손님이 온 첫날이니, 연어 파티를 하자고 하셨다. 작은 마을에서 즐길 수 있는 유일한 파티. 감사하게도 바로 오늘이었다.
페루는 날씨가 참 요상하다. 갑자기 비가 한바탕 쏟아졌다가 쨍쨍해지기도 한다. 예기치 못한 상황들과 변수들은 날씨뿐만이 아니다. 시내에서 마을로 들어가기까지 두 개의 산을 넘으면서 올라가는데, 올라가는 중간에 갑자기 쏟아질 비. 번개에 대비해 뒷 트렁크 포대를 단단히 여몄다. 그리고 급격히 올라가는 높은 해발고도. 갑자기 산을 두 개 올라가면서 해발고도가 시내(3400m)에서 마을(4000m)까지. 한 번에 고도가 600m 높아지기 때문에 고산병에 대비해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산을 한 개씩 타면서 200m 단위로 끊어가며 휴식을 취했다. 신부님이 주신 고산 약을 한 알씩 먹으면서 쉬엄쉬엄. 고산에 유독 약한 우리 부부. 그리고 6년째 이 마을에 지내면서 아직까지도 적응하지 못해 고산병을 달고 사는 신부님. 특히 신부님은 매주 쿠스코 시내에서 마을로 일주일 치 식량을 준비하기 위해 6년째 거르지 않고 매주 오르락내리락 이동하시지만 마을에 도착하면 이틀 동안은 침대에만 누워 계신다고 하셨다.
우리 부부 잘 견뎌낼 수 있을... 까?
유독 심한 고산병을 앓고 계시는 신부님. 오랜 시간 고통을 견디면서 사역을 감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낯선 타지에서 오로지 사명감으로 지내기엔 고산병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기에. 더욱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 부부도 비록 고산병이 다가와도 (숨이 차고 열이 오르는 증상) 약을 먹으면서 하늘마을에서 잘 버텨보기로 결심했다. 신부님처럼!
하늘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번개가 자주 들이치면서 전기가 자주 나가는 하늘마을. 그래서 전기는 태양열로 조금씩 전기를 끌어다 쓰지만 TV나 핸드폰은 당연히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마을에서 볼 수 있는 재미있는 광경 하나가 TV가 나오는 가게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광경이었다. 처음엔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나? 하며 상점 안을 들여다봤는데, 재미있는 영화가 쉼 없이 틀어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블랙홀 같은 곳이었다. 우리나라 60-70년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만화방에 모여 다 같이 TV를 시청했던 그때 그 시절. 이야기로만 전해 들어왔던 그때 그 시절을 이 곳 야나오까에서 만났다.
이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 떼, 알파카 떼, 당나귀 떼를 몰고 다니는 건 어린아이들이다. 야무진 손으로 채찍을 들고 양 떼 몰이를 하면서 아침엔 푸른 초원을 향해, 저녁엔 집을 향해 출퇴근을 한다. 열심히 가축을 기르고 키워야만 생활비에 보탤 수 있기 때문에. 가축의 가죽. 털. 고기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마을 사람들. 엄마는 아이를 키우거나 마을에서 물건을 팔고, 아빠는 시내에 나가 물건을 팔고, 아이는 가축을 몰고 기르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신부님은 일주일 내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미사를 진행하신다. 마을 곳곳에 작은 성당들이 있는데, 보통 성당에서 미사가 있는 날이면 미사를 드린 후 주민들끼리 회의하는 장소로도 쓰인다고 한다. 사람들이 보통 시계가 없어서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다. 미사가 11시면 신부님은 10시 반 정도에 도착을 하셔서 10분 정도 자동차 경적 소리로 사람들에게 미사 시간임을 알려주신다. 종 대신 자동차 경적으로 알람을 대신하는 것이다. “빵빵” “빵빵” 계속되는 알람 소리에 일어나 어슬렁어슬렁 나오는 사람들. 이 모습 또한 정겹게 보이더라. 그렇게 사람들은 신께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 번개로 인한 경작물 피해가 없게 해 달라는 기도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신부님에게 기도를 받고, 성수를 받고 돌아간다. 이들에게 신의 개념이란, 간절히 기도하면 이뤄줄 거라는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희망”은 살아가는데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힘을 주기도 하는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산소호흡기를 끼다
하늘마을에서의 생활. 생각보다 몸이 잘 적응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우리의 착각이었다.
밤에 숨이 안 쉬어져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잠을 못 잔다는 것. 꽤나 괴로운 시간이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잠을 잘 때면 어김없이 산소 부족 증상이 찾아왔고, 두통을 동반한 고열이 끓었다.
마치 부족한 산소를 가지고 잠을 자기 위해 몸이 발악하는 증상처럼 느껴졌다.
낮엔 그나마 덜 움직이며 크게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숨을 쉬고 있어 괜찮다고 생각했나보다.
어김없이 밤에 잠이 들 때면 찾아오는 호흡 곤란 증상이 우리를 괴롭혔다.
엎드려 기도하는 자세로 있으면 그나마 숨이 쉬어졌으며, 똑바로 눕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밤에 잠을 뒤척이다 몇 번이나 깨는 수면장애가 찾아왔다. 생활리듬이 깨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를 지켜본 신부님의 특약 처방.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자야 해요
숨이 잘 안 쉬어져 고산증세가 계속 옵니다.
우리 숙소에 놓인 큰 산소 호흡기. 처음이었다. 고산에서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잠을 자게 될 줄은 두 사람 모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호흡을 도와주는 장치가 생기니 훨씬 수월하게 잠에 들 수 있었고, 고산 증세도 차츰 없어졌다. 이처럼 하늘마을에서의 생활은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내 평생 ‘언제 산소 호흡기를 끼고 생활해 보겠어?’라는 깜찍한 생각이 들었던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고산병은 참으면 금세 낫는 증상이 아니다. 몸에 산소가 부족하면 계속해서 고통이 온다. 몸에서 열이 나거나 두통이 밀려와 계속되는 구토로 시달린다. 우리는 높은 하늘마을에서 고산병을 달고 지냈지만 이 또한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하며 산소호흡기를 베개 삼아 옆에 꼭 안고 잠에 들었다.
특별한 하늘마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이 좋았으며, 계속 이 곳에서 생활하고 싶었던 이유는,
다음 편에서 소개할 우리의 마지막 봉사 장소. “티카리(캐츄아어 : 꽃을 피우다)학교” 학생들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