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어비앤비 Feb 26. 2020

로마에서 밤의 피크닉

이별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하나의 문이 닫히면, 새로운 하나의 문이 열린다.


어떤 문구가 “뜨악"하게 와 닿을 때는, 그 문구를 절절하게 경험했을 때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새로운 하나의 문이 열린다.” 나는 너무너무 좋아했던 사람과 이별하고 에어비앤비를 만났다. 그리고 에어비앤비 사람들과 사랑에 푹 빠져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긴긴 연애를 하고 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조금 더 생생하게 이 인연의 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당시 나는 (여느 연인들처럼) 운명적인 첫 만남을 시작으로 독일에 사는 남자친구와 연애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고, 하루하루 벅찬 행복에 잠 못 이루는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각자의 미숙한 애정 방식과 크고 작은 이기와 욕심이 서로의 나약함을 건드리게 되었고, 결국 우리가 손꼽아 기다렸던 유럽 여행에서 각자 눌러 담았던 감정의 폭탄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의 다툼으로 우린 영영 먼 사람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이렇게 담담하게 말할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안고 하루 종일 울기만 했다.

옥토버페스트, 이별의 기억만 남아버린 축제

몇 달을 손꼽아 기다린 유럽 여행이 이별의 아픔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렸던 때, 한국에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괴로운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 독일에 살고 있던 친구 마리가 나의 상황을 알게 되었고, 생각지도 못했던 로마 여행을 제안했다.


레아, 우리 로마에서 만나자. 로마의 아름다움은 너의 아픔을 치유해 줄 거야!


그렇게 갑자기 로마 여행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에어비앤비를 만났다.




이별이 데려간 첫 번째 장소, 로마


이별을 겪으면 가슴 한편에 구멍이 난다. 그리고 그 구멍으로 쉴 새 없이 공허한 바람이 드나든다. 마리는 그때 내게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공간이 필요하는 걸 알았던 것 같다. 마리는 로컬 이탈리안의 멋진 숙소에서 함께 요리도 해 먹고 슬픈 이야기도 다 털어내자며 에어비앤비 숙소를 빌리자는 제안을 했다. 운 좋게도 로마 시내에 위치한 예쁘고 아늑한 에어비앤비 숙소를 예약할 수 있었다.


먼저 숙소에 도착한 나는 호스트가 미리 켜 둔 따뜻한 노란 조명과 웰컴 메시지 앞에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한참을 엉엉 울었다. 처음 만난 에어비앤비 숙소는 여행자들의 바쁜 흔적이 남아있는 낯선 공간이 아니라 지친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먼 친척 집의 공간처럼 편안했다. 곧 마리가 숙소에 도착했고, 편안한 숙소와 나를 아껴주는 친구와의 만남에 마음이 놓여 나는 그렇게 또 한바탕 눈물을 쏟았다. 제법 오랜 시간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해가 지고 저녁시간이 다가오자 마리는 로마 스타일 피크닉을 떠나자고 했다.


“레아, 나만 믿고 따라와!" 어쩌면 마리는 나를 슬픔에서 구해주기 위해 하늘에서 보낸 천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마리를 따라 배낭에 와인, 치즈, 빵, 햄, 과일, 작은 그릇과 칼, 하얀 천을 넣고 피크닉 장소로 향했다.

(좌) 배낭 메고 피크닉 가는 길 / (우) 해가 지는 로마

어둑어둑한 언덕을 얼마나 올랐을까, 마리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바로 저기야!”라고 외쳤다. 마리가 가리킨 곳은 로마 시내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넓은 돌담이었다. 마리는 아주 프로페셔널한 자태로 하얀 천을 멋지게 펼쳐 깔고는 준비한 재료들을 플레이팅 했다. “짜잔~” 눈 깜짝할 새에 끝내주는 로마 스타일 피크닉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리야, 나 슬픈데 너무 행복해." 내 마음은 여전히 슬픔의 색을 띠고 있었지만, 마리와 함께한 밤의 피크닉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좌) 피크닉을 준비하는 마리의 모습 / (우) 로마 밤의 피크닉을 마리와 함께

피크닉을 마치고 언덕을 내려와 로마의 밤거리를 걷다 보니 거리의 악사들이 이곳저곳에서 멋진 공연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근처 자리에 앉아 공연을 감상했다. ‘여기에 와인 한 잔만 있다면 정말 완벽하겠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정말 놀랍게도 마리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와인 한잔 하면 완벽할 것 같지 않아? 내가 이럴 줄 알고 와인을 한 병 더 넣어왔지.” 판타지 영화 속 비밀의 열쇠를 발견한 영웅의 모습으로 와인병을 꺼내는 마리의 모습에 나는 모처럼 크게 웃었다. 향긋한 와인과 멋진 음악, 로마의 아름다운 밤 조명, 그리고 이 모든 걸 함께 나누는 친구. 나는 완벽한 순간 속에 있었다.

거리의 악사들



이별에 효과 좋은 할로윈 파티 처방


깨어있을 때는 슬픔이 나와 꼭 붙어 있었기 때문에 잠이 제일 좋았다. 잠잘 때만큼은 잠시 슬픔과 거리를 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깨어있었지만, 좀 더 자고 싶은 마음에 늦장을 부리던 아침이었다. “레아, 그거 알아? 오늘 할로윈이야!” 할로윈에 신이 난 마리의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마리와 함께라면 나는 내 슬픔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 우린 할로윈 코스튬이 없어. 어쩌지?” 갑작스럽게 쇼핑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마리는 고민에 찬 모습이었다.


“마리, 나 메이크업 잘해.” 메이크업에 자신이 있는 나는 가까운 마트에서 하얀 섀도와 빨간 립스틱을 하나 구매했고 신나게 분장을 시작했다. “레아, 우리 진짜 무서운 것 같아. 내 얼굴인데 너무 무서워!” 우리는 할로윈에 아주 적합한 무시무시한 분장을 완성하고 근처 펍으로 향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날 우리를 마주한 로마 사람들은 밤에 악몽을 꿨을지도 모르겠다. 끝내주게 무서운 우리의 얼굴은 단연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단번에 인기스타가 되었다. 무서운 분장 덕분인지 할로윈 파티 감흥 덕분인지 나는 슬픔을 잠시 잊고 모두와 함께 웃고 춤추며 신나는 할로윈 밤을 보냈다.

(좌) 너무 무서운 할로윈 분장 / (우) 새로운 친구들과 할로윈 파티에서

로마 여행의 마지막 날에는 함께 로마 시내를 걷고 또 걸었다. 모든 건물 하나하나가 미술품처럼 멋진 로마는 정말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었다. “마리, 고마워. 네가 말한 대로 로마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마리는 행복해하는 나를 꼭 안아줬다. “로마에 오길 잘했지? 나도 레아 너와 함께 로마에 와서 정말 기뻐!"

마리와 함께 로마 산책



이별이 데려간 두 번째 장소: 에어비앤비


눈물 콧물 쏙 빼게 만든 나의 이별은 나를 아름다운 로마로 오게 했고, 소중한 친구 마리와의 추억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정말 재미있게도 나는 이때의 멋진 여행을 통해 에어비앤비를 알게 되었고,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에어비앤비에서 일을 하고 싶어 바로 지원을 했다. 운명의 여신의 인도를 받아 에어비앤비에 합격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에어비앤비 직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하나같이 그때 내가 로마에서 느낀 따뜻함을 느끼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든, 어떤 생각과 삶의 방향을 가지고 있든, 이곳 사람들은 나 자체로 나를 인정해주고 또 나의 삶을 응원해준다.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던 나에게 “로마의 아름다움은 너의 슬픔을 치유해줄 거야!”라고 했던 나의 친구 마리처럼 인생은 슬퍼만 하기엔 즐겁고 신나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려주러 온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다. 평생의 친구들을 이곳에서 다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나는 이곳을 정말 아끼고 사랑한다.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 살고 있지만, 출근해서 내 곁의 사람들을 만나면 마음에 용기와 기쁨이 가득 찬다.


인생은 정말 흥미진진한 곳임에 틀림없다. 이젠 누군가와 큰 이별을 하거나, 슬픈 일이 생기면 또 어떤 멋진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고 내심 기대를 해본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새로운 하나의 문이 열린다.

아끼고 사랑하는 에어비앤비 사람들과




에어비앤비 작가 레아

에어비앤비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퇴근 후에는 시를 쓰고, 춤을 추고, 요가를 하고, 음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립니다. 종종 회사에서도 신이 나면 춤을 춥니다.

인스타그램 @limchai_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