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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어비앤비 Feb 06. 2020

현지인의 축복을 받았던 유럽 여행

The 유럽 신혼여행

신혼여행지에서 싸우는 커플들이 많다 많다 하지만, 우리가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 부부는 대학 신입생 때부터 알고 지냈고, 졸업 후 사귀기 시작해 10년 동안 작업실을 공유하며 작업과 연애를 병행하다 결혼했다. 작업을 하던 중이나 연애를 하던 중, 서로 의견 차이는 있었지만 크게 싸운 일이 없었다. 그런 우리를 주변인들이 보나, 스스로를 보아도 죽이 잘 맞는 사이라 자부하던 우리가 10년간 함께하면서 으레 자주 갔던 해외여행임에도 'The 신혼여행'에서 크게 싸울 줄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결혼 전에도 미주나 동북아시아 지역은 자주 갔었지만, 유럽은 처음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결혼 준비와 작업 마무리를 동시에 진행해야 했고, 일이라는 것이 항상 예상과는 다르게 진행되는 탓에 순위에서 밀린 신혼여행 준비는 미흡한 채로, 잘 알지 못하는 도시 파리에 덜컥 와 버린 것이다.

 

여행 준비는 항상 내가 해왔던 일이라 남편도 나도 나를 의지하는 상황이었는데, 결혼 준비와 전시 준비, 거기에 여행 준비까지 해야 하니 준비라곤 다른 이들의 블로그와 여행책자에서 본 꼭 가야 할 곳 리스트, 에어비앤비 앱으로 호스트가 알려 준 집주소와 공항에서 파리 시내로 가는 방법뿐이었다. 3달간 유럽여행을 할 생각이라 그에 맞는 짐을 26인치 사이즈의 캐리어 4개에 들고 왔다. 특별한 여행이니까. 유럽이니까 라는 기합과 긴장의 결과였다. 필수품만 넣어서 다니는 배낭여행이 아닌 [The 신혼여행]이니 평소에 입지도 않던 화려한 옷을 잔뜩 싸와 인생 사진을 남기자는 계획의 두 개의 캐리어와 특이한 소품으로 잔뜩 채워오자라는 생각으로 가져온 나머지 두 개의 빈 캐리어까지 들고, 파리의 지하철을 처음 접하게 된 우리는, 한국이 지하철 선진국임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 어서 와, 파리 지하철은 처음이지?



서투른 섣부름


한국어 패치가 없는 것은 기본이고, 오래된 역이니 만큼,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의 존재는 미미했다. 파리 지하철의 통로들은 성인 남자 셋 정도가 나란히 걸으면 꽉 차는 사이즈였고. 우리 둘은 13시간의 비행과 만연한 프랑스어로 이미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짐은 무겁진 않았어도 부피가 컸고, 욱은 자신의 허리까지 올라오는 큰 캐리어를 The 새 신부인 나에게 들지 못하게 하며 그 좁은 계단 통로를 4개의 캐리어를 들고 오르내렸는데. 하필이면 그때가 오후 6시 퇴근시간이었다. 


파리에 관한 소식을 알려주는 블로그들과 이미 유럽에 다녀온 지인들의 경험담을 통해 이런 상황에선 소매치기를 당하는 게 일상이라는 소문을 듣고 온 터라 본인도 정신없는 탓에 나까지 신경 쓰려하니 피로가 급증하는 것이 보였다. 나 또한 상황이 좋지 않으니 나 또한 짐을 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지키고 있던 캐리어 두 개를 들고 오르려던 중 “익스큐제무아(Excuse moi)”라는 소리를 들었다. 잘생긴 중년 남성이었는데, 나에게 짐을 들어줘도 되겠냐는 몸짓을 했다. 나는 빠르게 “고맙습니다(Merci)!”라고 대답했다. 처음 본 그는 캐리어를 번쩍 들고 계단 위까지 올려주며 산뜻하게 눈인사를 하고 자신이 갈 길을 갔다.


혹시, 내가 여자 사람이어서 일까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욱에게도 많은 파리지엔들이 짐을 들어주겠노라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그 많은 구호의 손길을 거부하는 욱도 보였다. 초행길에, 복잡하게도 환승을 여러 번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현지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하겠다는 욱의 의지를 나는 무시하고 올라야 하는 계단마다 파리지엔들의 선심으로 몇 번의 도움을 받았고, 우여곡절 끝에 좁고 복잡한 지하를 벗어나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에는 완성된 화신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위험한 곳에서 낯선 사람한테 막 짐을 맡기고 그래도 되는 거야? 당신이 위험한 행동을 하면,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당신에게 맡길 수 있겠어?!” 라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 파리 지하철 던전에서 탈출 직후 굳은 욱과 캐리어들

그의 이런 행동은 종종 볼 수 있었지만, 한국에서 웬만한 일은 그 스스로가 해내거나 우리가 해낼 수 있었기 때문에 문제라 치지 않고, 그 만의 성격이구나 했었는데. 낯선 나라에서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상태에서는 그 성질이 폭발했다. 그의 표현이 황당했던 터라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잘 해결되었잖아, 왜 그렇게 말하는데? 덕분에 체력을 더 낭비하지 않고 이렇게 잘 오지 않았어? 그리고 도와준다는 사람들을 다 거부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냐?”라고 답하니, 다툼은 더 커졌다. 결혼 선배들이 싸울 때 절대로 하면 안 된다는 상대의 방식이 이상해하다는 말을 하게 된 우리는 몸과 마음은 격앙되고 동시에 위축된 상태로 파리의 첫 숙소로 향했다.




숙소의 요정


숙소는 세탁기와 주방도 딸려있는 아파트 전체 사용 가능한 숙소였다. 웹으로 예약하기 전 프랑스 영화에서 보던 풍경 속 집을 직접 사용해볼 수 있다니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을 기대했지만, 다툼 후 피폐해진 우리는 굳은 얼굴로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숙소가 가까워질 즈음 미리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호스트의 이웃 폴(Paul)의 환대를 받았다. 낮에 출근하는 호스트를 대신해 열쇠와 숙소 안내를 맡았다고 했다. 폴은 언젠가 보았던, 프랑스 영화에 나온듯한 밝은 이미지의 중년의 남자였는데 우리를 발견하자 매우 밝게 “봉주흐(Bonjour)!” 라 인사를 건넸다. 한국에서 온 신혼부부라는 우리의 첫인상을 위해 냉전을 감추고, 어색한 미소로 인사를 했다. 폴은 우리가 이곳에 오는 내내 우리를 괴롭힌 문제의 시초-캐리어들을 가리키며 자신이 들어주겠다고 했다.


욱은 지금껏 본인이 보였던 입장을 견고히 하려는 듯. 괜찮다며 4개의 캐리어를 모두 들고 복도로 들어섰는데, 큰 캐리어들을 양손에 들고 오르기엔 계단 폭이 파리 지하철의 1/3 정도로 좁아 성인 남자 한 명이 서면 꽉 차는 사이즈였다. 폴은 욱의 거절에도 개의치 않고 호탕하게 웃으며, “나는 너희를 도우려고 있는걸!”이라면서 캐리어를 하나를 들고 스머프에서 나올법한 좁고 구불구불한 나무계단을 올랐다. 욱은 훅 들어온 폴의 도움에 당황했지만, 어느 정도 체념한 듯 그 뒤를 따랐다.

▲ 앙증맞은 스머프계단

욱과 폴이 올라간 후 나 또한 계단을 올랐다. 오래된 나무계단인지 끼익끼익하는 소리가 났다. 파리에 대해 알게 된 새로운 사실. 이곳에선 2층은 사실 3층이라는 것. ‘숙소가 맘에 안 든다고 욱과 여기서 더 싸우게 되면 어쩌지’ 불편한 마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계단 끝에 만난 예쁜 빨간 문을 보니 이곳이 우리가 묵을 곳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폴이 그 문을 열었다.


숙소를 본 첫 소감은, 이 좁은 통로를 통해서 어떻게 가구들을 집으로 들일 수 있었을까? 바닥이 타일이네. 맨발로는 차갑겠다.라는 생각뿐이었다. 마음속 냉전 필터가 아직 작동 중이라 감상은 거기까지. 여러 가지 이유로 지쳐서 영혼 없는 눈으로 멍한 우리를 보았는지, 폴은 로비에 남은 캐리어를 자신이 가져올 테니 방을 구경하며 쉬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욱과 나를 방으로 밀어 넣었다.


폴이 우리의 짐을 가지러 3층 같은 2층의 계단을 내려간 사이에, 방의 이곳저곳이 살펴보았는데, 한옥에서 보았던 투박하고 큰 나무 기둥과 프랑스 특유 색채를 지닌 오렌지색 타일의 특이한 조합을 베이스에 공간을 나무를 직접 깎아 만든 선반과 장, 소박한 느낌의 차렵이불이 덮인 퀸 사이즈의 폭신한 침대가 있었다. 공기는 따뜻했고 낡은 나무와 햇빛이 만난 푸근한 냄새가 났다. 조금은 안심이 되어서 한숨이 폭하고 나왔다.

▲ 신혼여행의 첫 숙소

그러던 중 욱이 나의 차가운 손을 잡으며 아까 화내서 미안해 라고 수줍게 말했다. 이른 봄인 4월의 차가운 날씨에 긴장을 하다 따뜻한 실내로 와서인지, 서운함과 미안함이 함께 녹아 얼굴에 열기가 오르는 듯했다. 긴장에 쉽게 서운하고 미안하다는 말에 금세 사그라드는 이유는 기다린듯한 안도감. 나도 미안해.라는 말과 함께 우리는 서로에게 쑥스러운 미소로 안도의 시그널을 보냈다.


순간 잠시 잊고 있었던, 폴이 계단을 오르내려서인지 상기된 얼굴로 캐리어를 놓으며 말을 했다. “조금 있으면 마트가 닫을 거야 먹을 것을 구하려면 서두르는 것이 좋을 텐데, 어딘지는 알고 있니?” 긴장이 풀리고 나서 폴의 말을 들으니, 우리의 현재 상황이 기억이 났다. 5시간 전에 먹은 기내식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 매우 배고픈 상태라는 것을.




예술의 도시


마트가 어디 있는지 묻자 그는 집을 크게 돌면 M&S라는 마트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오후 7시 아직 밖이 환한데 조금 있으면 마트가 닫는다니? 폴은 간단히 주방이나 세탁기, 샤워실의 위치를 알려주고 우리에게 숙소 열쇠를 건네주고, 어서 마트로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우리는 요정같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사라지는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이동 중 꽁꽁 싸 둬 숨을 못 쉬었던 캐리어를 풀고 폴이 알려준 마트에 대한 정보를 구글맵으로 확인했다.


폐점 시간이 8시 30분. 대도시 한복판의 마트도 오후 8시 30분에 닫는구나. 한 시간 남짓 남았으니 슬슬 나가면 되겠네 하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대문을 나온 우리는 그제야 숙소의 주변을 자세히 보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가 있는 곳은 우리나라의 경리단길 같이 디자이너 숍들이 즐비한 유명한 생제르망 거리에 인접한 거리인 뤼 프헝 세스(Rue Princesse)였다. 지나가는 곳마다 감각적인 옷과 소품들이 쇼윈도마다 가득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엔, 심적 여유가 없어서인지 보지 못했던 가게들을 보고서 “우와, 우리 숙소 진짜 잘 구한 것 같다. 특이한 가게들도 많다. 알고서 온 거야?” 욱은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물었다. “아니 나도 몰랐어.” 그저 운이 좋았다.

▲ 직접 만든 가게의 간판을 보는 것만으로도 예술력이 올라간다

우리의 여행 스타일은 먹으면 없어지는 식비를 줄이는 대신 예쁜 소품을 사모으고 미술재료나 관련 서적에 사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행 숙소는 재료만 있으면 음식을 할 수 있는 주방과 세탁이 자유로운 곳을 찾기 위해 에어비앤비를 찾는다. 에어비앤비 지도 내에서 우리가 원하는 옵션과 예산에 맞는 숙소를 체크해두고 그중 골랐는 데, 여행책에서 말하는 파리 구역마다의 특성은 고려해볼 여유가 없었던 우리에게 행운같이 좋아하는 분위기의 동네를 찾은 것이다. 파리 여행후기를 담은 블로그나 책자에서 나온 정보 안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현지의 작은 숍들이 곳곳에 있었는데, 많은 이들을 위해 공유하기보다 오롯이 나만이 알고 싶은 특별한 곳과 요일마다 바뀌는 통에 따로 설명을 할 수가 없는 곳이 있었다.


우리 숙소 바로 아래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가게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요일마다 주인이 바뀌고 그들이 팔고 싶은 것을 파는 가게였다. 우리가 도착한 수요일은 어떤 중년의 부인이었는데, 도자 장식과 놋쇠로 만든 장식품, 그리고 손수 만든 비누를 팔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기엔 1,2유로의 저렴한 가격에 귀엽고 특이한 작품들이라, 하나하나 만져보게 되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결국 필요는 없지만 귀여운 도자기 인형을 사들고 가게를 나왔을 땐 오후 8시가 되었다.

▲ “오늘만 팔아요” [상인이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본 목적이었던 마트로 뛰어갔다. 파리에서의 첫 저녁을 배고픔에 지쳐 아무 가게나 쭈뼛거리며 들어가 비싼 데다가 맛이 없을지도 모르는 외식을 할 수는 없었고, 한국에서는 흔한 24시간 편의점이 이곳엔 없기에, 우리는 빠르게 마트를 찾았다. 마트 안에는 퇴근할 생각으로 신이 난 마트의 직원들이 마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직원들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빠르게 눈인사를 하며 한창 마감정리 중인 마트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빠르게 두 눈으로 포장지의 시각정보만으로 맛있을 것 같아 보이는 레토르트 식품들을 스캔했고, 처음 보는 납작 복숭아와 상추와 깻잎으로 구성된 쌈의 나라 한국의 마트에서 잘 볼 수 없는 샐러드용 야채를 사고, 가장 중요한 물도 큰 통으로 골랐다.


계산을 할 즈음엔 그제야 헐레벌떡 들어오는 다른 손님들을 보고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 아님에 안도했다. 8시 30분이 되어 밖으로 나오니 그새 해가 져버렸다. 마트에 들어설 때와 나올 때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뀐 것이 신기했는데. 가게마다 노란 조명을 밝혔다. 곧 닫을 마트를 제외하고 하얀 조명을 볼 수 없었는데, 노란빛으로 물든 거리는 좀 더 로맨틱한 분위기가 생겼다. 가게들 마다 안에는 손님들로 가득했다(언제들 들어간 거지?).

▲ 내외부 모두 아름다운 파리의 가게들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저녁식사를 하는 듯한 넥타이를 맨 회사원으로 보이는 젊은 사람들, 남겨진 목적지가 곧 집인 사람들을 보니, 꾸며진 사물들은 다르지만 우리나라의 퇴근시간 풍경과 비슷하게 겹쳐지면서 장바구니를 든 나 또한 이곳에서 생활인으로 속해져 있는 것 같다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국 거리와 조금 다른 점은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의 사이, 가게 사이를 지날 때마다 꾸며놓은 홍보물들에 사용된 색감이 눈을 즐겁게 했다.


파리의 사람들은 19세기 무렵 알퐁스 무하를 포스터 작업을 사랑하고, 그의 작업은 파리의 한 인쇄소(Imprimerie Champenois)에서 인쇄를 도맡아 했다는데, 지금도 그 감성을 갖은 후손들이 지금까지 그 명맥을 이어온 것이 아닐까 길에 붙은 작은 전단에도 색감과 품질이 너무 좋아 보여 그냥 지나가기에 아까워 자꾸만 멈춰서 떼어가도 될까 고민을 하게 되었다. 마트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서도 화려한 옛 건물들과 그에 맞춘 문, 건물의 장식들, 그리고 그 안에서 생동하는 파리지엔들의 감성들을 보니 과거뿐 아니라 현재에도 예술로 생활하는 도시라는 것을 실감했다.

▲ 밤이 되자 도시의 색이 변했다.

파리의 NPC


집으로 돌아오니, 2층 같은 1층에 살고 있던 본 호스트 루실(Lucil)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루실은 도착하는 데에 불편함은 없었는지 짧은 인사와 함께 밤에 간단한 술자리를 하자고 제안했다. 분명 처음 본 사이임에도 현지인의 집에 초대를 받는 건, 에어비앤비의 매력 중 하나. 지인 하나 없는 여행자가 숙소 공간 외에 현지인의 집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라니.

▲ M&S에서 장 본 것으로 만든 간단한 저녁식사(?)

욱과 나는 간단하게 마트에서 사 온 것을 먹고 9시경에 루실의 집으로 내려갔다. 루실의 집에는 예술이 진하게 느껴졌는데, 집안 곳곳에 여러 페인팅과 조각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루실은 프랑스의 와인과 치즈를 대접해주었다. 우리가 영어도 프랑스어도 유창하지 못한 덕에 대부분 루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잠깐 들어도 뭔가 유구한 가족 역사 이야기였다. 자신의 증조할머니가 러시안이고 할머니가 프랑스로 넘어오기 전 러시아에 살고 있을 때부터 아티스트를 사랑하고 응원해왔다는 것과 루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예술가로 살았다고 했다. 지금은 루실의 딸이 예술 공부를 러시아에서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 온 예술인들은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고 예술인이 생각하는 프랑스와 러시아는 어떤지 궁금해했다.


루실이 단순하게 우리의 국적보다 예술가라는 개인에게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에어비앤비의 호스트 소개란에 알 수 없었던 아트 러버라는 특성을 갖은 호스트를 이렇게 만날 줄이야. 덧붙여 루실이 에어비앤비를 하게 된 이유는 지금은 러시아에 있는 딸의 비어있는 방을 여행자들에게 사용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덕분에 다양한 여행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겁다고 했다. 우리는 짧은 영어와 프랑스어와 번역 앱을 섞어서 열심히 대화를 이어나갔다. 와인 때문인지 여독 때문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그간 긴장했던 모든 것이 완전히 녹아버려 눈이 감겨왔다.


루실은 웃으며, 첫날부터 자기가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은 것 같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친절한 호스트가 아트 러버인 것이 신기하고, 초대해 주어서 고맙다 하며 미리 준비한 한국의 차를 선물해주었다. 루실 또한 자신의 갑작스러운 초대로 생각지도 못한 우리의 선물로 즐거워했다. 그리고 남은 파리의 일정 동안 많은 것들을 보고 즐겼으면 좋겠다고 우리를 축복해주었다.


이후 루실의 바쁜 일정으로 우리들은 만나지는 못했지만. 미술 재료상이나 특이한 소품 가게를 에어비앤비 메신저를 통해 알려주어서 어려움 없이 만족스러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파리에 오자마자 현지인들의 친근한 축복 같은 도움을 받아서인지, 낯설고 어렵게 느껴진 파리라는 곳이 마치 새로운 게임 맵이 열리는 것 같은 흥미로움으로 와 닿았고, 어디를 가던 그곳에 받아들여졌다는 기분이 들어 담담하고 거침없이 지낼 수 있었다. 말랑해진 마음으로 겪는 파리는 책에서 나온 필수코스 외에 불현듯 나타난 일상의 여러 나만의 감성코스들을 보게 해 주었다.


누군가의 기준인 인기 스폿. 죽기 전에 가봐야 하고 먹어야 하는 것들. 그리고 그것을 체험해도 뭔가 나와 맞지 않거나, 그것을 하지 못해 스트레스받는 딱딱한 여행패턴을 벗어날 수 있는 시각과, 새로운 나만의 경험을 만들 수 있었다. 우리는 파리에서 줄을 서서 먹는 유명 스테이크 집에 줄을 서는 대신 그 옆 골목에 100년 전부터 있었을 것 같은 낡고 작은 레스토랑에서 나이가 80살로 보이는 웨이터 할아버지를 보고 웃고, 유명 스테이크 집보다는 덜하지만 엄청난 가격의 엉망인 스테이크를 먹고도 욱과 나는 사소한 재미거리를 찾고 킬킬거렸다. 이후 다른 이들의 유명 스테이크 집의 후기는 우리가 겪은 엉망 스테이크와 별반 달라 보이진 않았다.

▲ 유명 스테이크 집 옆 낡은 레스토랑. 비틀비틀한 할아버지 웨이터를 보고 나서 심란해하는 욱

센강에서 한강에서도 안 타본 비싼 유람선을 타는 것을 하지 않고, 숙소에서 커피를 머그째로 갖고 나와 센강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만난 백조, 오리가족을 가까이서 보게 된다 던 지 하는 사건들은 행운과도 같았다. 파리 여행 이후에도 밀라노, 베네치아, 베를린, 바르셀로나 등 유럽의 곳곳을 여행했는 데, 바르셀로나에서 당시 신상이던 아이폰 8을 버스 안에서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호스트와 시민들에 의해 다시 찾는 경험을 할 정도로 행운이 연속되는 여행을 할 수 있었다.

▲ 너무 경계 심 없이 다가오는 백조, 오리가족들.

어떤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자신이 그 지역을 대표하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여행자를 돕는 든든한 호스트들의 도움이 컸다. 어쩐지 현지 NPC 같은 동네 사람의 축복으로 현지인 아우라가 우리에게 생긴 것 아닐까. 유럽 전역에서 극성이라는 소매치기들의 레이더에서 제외된 것을 보면 이라는 말도 안 돼 는 상상을 해본다.




새로운 맵이 열렸습니다


여행 전, 지역에 대한 많은 공부를 한다고 해도 이곳의 사람들과 동네의 분위기까지는 직접 겪지 않고는 알 수 없었던 것이 대부분이다. 여행자가 한정된 시간 동안 그곳과 깊이 동화될 수 있는 방법은 가장 밀접하게 도움과 응원을 주는 현지의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아닐까. 에어비앤비의 호스트는 여행하는 낯선 여행자에게 행운의 축복을 주는 현지 맵 안의 NPC가 아닌지 생각해본다.

▲ (좌) 장보고 돌아가는 길에서 만난 수선집, (우) 덤덤한 셀프산책 개들을 은근 볼 수 있었는데, 대부분 앞 가게에서 산다.

낯선 곳, 무지와 긴장으로 사소한 문제에도 심각했던 우리의 첫 유럽여행은 여러 도시에서 만난 많은 현지 NPC들의 축복으로 용기가 쌓여, 이후 새로운 여행길에서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도움을 받고, 더 나중에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 여행을 마치고 온 한국의 일상 중 만나게 된 여행자들. 길을 잃거나 무거운 짐에 어려움에 처한 그들을 만나면 우리의 경험이 생각나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한국인 NPC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역할을 종종 하다 보니 여행자들 중엔 예전 우리의 모습처럼 잔뜩 긴장해 도움을 받지 못하는 여행자도 볼 수 있었는데, 내가 현지인이 되어 그 여행자를 보니, 아 우리의 모습이 이러했구나라는 생각에 다시금 반성을 하고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긴장감과 흥분감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 내가 파리 던전에서의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모르는 마음이겠지.


우리는 또 다음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신혼여행을 떠났던 3년 전보다 좀 더 레벨 업된 유연한 여행자로 지식보다는 마음을 더 많이 준비해보려 한다.




에어비앤비 작가 김남희

창작을 하는 가장 첫 기억은 얼굴을 왼팔에 깊게 괴고 이야기들을 생각하며 크레파스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상황 속에 사람 간의 이야기를 상상하는걸 특히 좋아했습니다. 현재는 프리랜서로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조형예술을 하고 있습니다.

인스타그램: @name_gin @namiwork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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