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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톱달방랑자 Apr 10. 2021

바다. 오, 바다!

취향에 관하여 #1

취향이라는 게 없던 그 시절에도 유일하게 나 이거 좋아해, 라고 말할 수 있던 게 바로 바다였다. 나는 바닷가라고 하기에는 뭍이고, 뭍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바다와 가까운 동네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에서 바다다운 바다를 보러 가려면 차를 타고 최소 20-30분은 가야 했고, ‘해수욕장’이라고 불리는 곳을 가려면 그 배의 시간을 차에서 보내야 했다. 배부른 소리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유년기의 내게 바다는 퍽 가까운 존재는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부산에서 태어났고, 약 16년을 바다가 보이지 않는 동네에서 살았다. 고등학교 입학과 거의 동시에 이사한 새 집, 아파트 맨 꼭대기 층의 다락을 개조해 만든 내 방 창문에서는 그림 같은 항구가 아파트 앞동의 어깨너머로 보였다. 집 공사가 채 끝나기도 전부터, 나는 매일 같이 야간 자율 학습을 빼먹고 내 공간이 될 그 다락방에서 창문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이사한 후로는 야간 자율 학습을 빼먹고 가는 곳이 집에서 바닷가로 바뀌었을 뿐이고. 내 사춘기는 그렇게, 제법 차분한 일탈로 지나갔다. 학교에는 미술학원에 간다고, 미술학원에는 학교에서 야간 자율 학습을 한다고, 그렇게 양 쪽에 소소한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보충 수업이 끝나면, 나는 곧장 버스를 탔다. 미술학원으로 향하는 노선 말고, 학교에서 약 1시간 30분 정도 떨어진 바닷가로 향하는 노선을. 그렇게 백사장에 앉아서 어둠이 내려앉은 바다를 마음에, 눈에, 귀에 가득 품고 돌아왔다. 뭐가 그렇게 답답했는지는 기억도 나질 않는데, 검은 파도가 일렁이는 밤바다를 보고 있자면 마음이 그저 평안해졌던 것만 떠오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년을 살았던 동네를 떠나 상경을 했지만 바다를 향한 짝사랑이 사그라들지는 않았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사람답지 않게, 나는 매년 여름 방학이면 꼭 해운대 바닷가를 찾았다. 부산 사람은 해운대 안 가, 라는 다른 부산 출신 친구들의 말에는 그럼, 당연하지 하고 공감을 하면서도. 물론 해운대가 내 최애 바다는 아니었다. 어떤 날은 광안리였고, 어떤 날은 청사포였고, 어떤 날은 다대포였다. 나는 ‘바다’라는 큰 취향 안에서 그다지 바다를 가리지 않았다. 서해도, 동해도, 남해도, 내게는 그저 ‘바다’였을 뿐이다. 물론 그중 가장 좋아하는 건 내게 익숙한 부산 앞바다였지만.


꽤 오래 한국을 떠나 파리에 발을 붙이고 살던 시기에, 내 가장 큰 아쉬움은 바다였다. 파리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는 도빌 deauville이었는데, 파리 생 라자르 역에서 기차를 타고 두어 시간을 달려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바다를 만나서 하루 종일 그저 바닷가에 앉아있다 돌아오는 데에 적게는 50유로, 많게는 100유로가 넘는 돈은 쓰고는 했다. 그 시기의 나는 “한국은 전혀 그립지 않은데, 바다가 그리워서 부산이 가고 싶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바다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 중에서도 나는 유난스러웠다. 매년 한 번이라도 바다를 보지 않으면 곧 죽을 사람처럼 우울해졌고, 바다를 보고 오면 그 바다를 마음에 품고 일 년을 살았다. 어떤 해에는 아프리카의 바다였고, 어떤 해에는 도빌의 바다였다. 어떤 해에는 노르망디 어디쯤의 바다였고, 또 어떤 해에는 일 하러 갔던 휴양지의 바다였다. 부지런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도 바다를 보는 일에는 유달리 부지런해졌다. 일을 마치고 새벽 기차로 돌아와야 했는데, 그전에 바다를 보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바닷가를 거닐었으니까.


그 마음만은 여전해서, 나는 지금 몸만 일으키면 바다가 보이는 부산 집으로 돌아왔는데도 시간이 날 때마다 제주도로 달려가고는 한다.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은 꼭. 무슨 핑계를 대어서라도. 그렇게 제주의 바다는 부산의 바다를 뛰어넘은 내 최애 바다가 되었다. 어느 쪽으로 걸음을 떼어도 바다가 보이는 제주도는 내게 아마 천국이 아닐까.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가 제주도 바다 중 최애를 묻는다면, 몰래 “세화 해변”이라 답해줄 것이다. 유난히 에메랄드 빛으로 빛나는 세화 앞바다는, 그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풍족해지는 내가 사랑하는 바다가 되었다. 지금 이 순간도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말 다 했지.


아마도 내 최초의, 그리고 최대의 취향일 것이다. 바다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면, 마음속을 꽉 채운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이 사그라드는 것만 같다. 흐린 날의 바다도, 맑은 날의 바다도, 비가 오고 눈이 나리는 날의 바다도, 밤바다도, 아침의 바다도 모두 다. 그것만은 바뀌지 않는 바다의 강점이었다. 바다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고, 내가 한아름 안고 간 말들을 묵묵히 집어삼켰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바다를 사랑할 이유는 충분했다. 꼭 세상에 버림받은 것 같은 날에도, 바다는 나를 쫓아내지 않았다. 쓸데없는 위로를 건네지도 않고, 나를 끌어안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바다는 내게 가장 확고한 취향이다. 누군가 좋아하는 것을 묻는다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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