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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톱달방랑자 Apr 10. 2021

음료는 아이스.

취향에 관하여 #2

나는 소위 말하는 고양이 혀를 가졌다. 뜨거운 것도, 매운 것도 그다지 선호하지 않고, 잘 먹지도 못하는. 어느 정도냐 하면, 뜨겁거나 매운 걸 먹으면 혀 끝이 아린 것은 물론이고 머리 꼭대기, 가마 근처 어딘가가 간질간질한 기분까지 든다. 열이 빠지지 않아 생기는 증상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도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그런 이유를 차치하고라도, 나는 얼죽아 회원이다. 얼어 죽어도 아이스. 누가 처음 지었는지는 몰라도 너무 공감하는 단어라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다. 아무리 추워도 따끈한 음료보다는 찬 음료를 먹어야 속이 풀리는 사람인 거다. 급한 성격 탓에 눈 앞에 음료가 놓이면 일단 비우고 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도 아마 따뜻한 음료보다는 시원한 음료를 선호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고.


어떤 음료를 좋아해? 라고 하면 여전히 조금 망설이게 되는데, 스*벅*에서는 주로 쿨라임 피지오, 가끔 계절 음료로 나오는 딸기 음료 정도를 선호하고, 그 외 다른 카페에서는 에이드 류를 즐겨 마신다. 커피는 카페인과 상관없이 아직도 맛을 모르는 편이라 입을 떼기 민망하고. 원두 종류에 따라 커피 맛이 달라진다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냥 웃어넘기고 마는데, 입맛이 무딘 편이 아닌데도 커피 맛은 잘 모르겠더라. 그냥 쓰다, 정도? 얘는 산미가 있고, 얘는 탄 맛이 강하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일 뿐, 내 앞에 가져다 놓으면 아마 알아채지 못할 게 분명하다. 커피는 그냥 향 좋은 한약에 불과하다. 적어도 내게는.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료는, 부끄럽게도 밀키스. 얼음을 컵 한 가득 채우고, 밀키스를 얼음 사이사이 빈 공간에 채워 넣은 후 단 번에 들이키는 걸 가장 좋아한다. 어디 가서 말하기 민망한 취향이라는 게 아마 이런 거겠지, 라고 생각은 하지만. 어쩌겠어, 내가 제일 좋아한다는데.


이런 식으로 숨겨지고 감춰진 내 취향이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암바사도 아니고, 암바사를 흉내 내어 만든 음료수가 가장 취향이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내 입맛은 싸구려입니다, 하고 광고하는 것만 같아서 입을 닫고 고상한 취향을 만들어내기를 수백 번 반복하며 살았다. 카페에서도 사랑하는 에이드 말고 사진 찍기 좋은 아인슈페너, 플랫 화이트 같은 커피를 시켜놓고 고상한 척 한 모금씩 홀짝여본 적이 있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나 민망했더랬다. 뭐 마실래? 라고 물어오는 지인 앞에서 나는… 하고 운을 떼고 메뉴판과 싸울 듯이 노려보는 일이. 그렇게 노려보다가 결국 말하는 게 에이드라는 건 좀 애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맛도 모르면서, 커피를 먹고 나면 괜히 입 안이 텁텁하고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있어 보이려고 어려운 이름의 커피를 주문하던 때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커피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있어 보이려고 그런다는 의미는 아니니 곡해하지는 말 것. 내가 그랬었다는 말일뿐이다.


우습게도 얼죽아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 스스로에게 작은 면죄부를 주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에이드나 뭐가 그렇게 다르겠어? 하고. 그 작디작은 면죄부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느냐 하면, 나는 이제 더 이상 메뉴가 잘못 나와도 구분하지 못하는 이름이 어려운 커피를 주문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상큼한 아이스 음료를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부끄럽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커피를 마셔야 어른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의 여자가 커피를 못 마시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걸 알기까지 나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가, 그때의 나처럼 스스로의 취향을 부끄러워하는 중이라면 그저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다. 그게 부끄러울 일이 아니라는 걸 아무리 말해봐야 쉽게 깨지지 않을 걸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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