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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톱달방랑자 Apr 11. 2021

햇살이 살랑이는 날 버스 타기.

취향에 관하여 #3

파리에 있을 때 나는 꽤나 자주 우울해했다. 그게 우울증이었을 수도 있고, 향수병이었을 수도 있고, 그저 지나가는 무력감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무엇이든 해야 했다. 파리에서의 생활은 낭만적으로 보였겠지만, 그곳에서 보낸 대부분의 시간은 그저 온 힘을 다 해 버텨내기에 가까웠다. 매달 벌어들이는 돈으로는 월세며, 생활비로도 빠듯했기 때문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번져 나오는 우울감을 치료하거나 다독이는 데에 쓰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숨만 쉬어도 돈이 새어나가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차라리 숨을 쉬지 않으면 돈이 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수시로 머릿속을 괴롭혔다. 특히 겨울의 파리는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기에 너무나도 좋은 환경이었는데, 그중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역시나 날씨였다. 파리가 내 삶의 영역이 되기 전까지는 몰랐던 부분이었다. 한 달의 절반 이상을 해를 바로 볼 수 없도록 두터운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그나마 햇살이 반짝 비치는 날이라고 해도 그 시간이 상상할 수 없도록 짧다는 것은. 한 평생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파리의 우중충한 날씨는 고문에 가까웠다.


처음 내가 파리에 발을 내디뎠던 해에, 누군가가 그랬다. 파리의 겨울은 기온이 낮지는 않은데 한기가 올라온다고, 뼈가 시리다고. 우스갯소리로, 한국이 아니라 따뜻한 남쪽 나라라고 부르던 부산에서 살던 내게 대학 생활 내내 겪은 서울의 겨울은 지독히 추웠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추워봐야 얼마나 춥겠어, 서울은 영하 10도, 20도는 껌인데. 파리는 영하로 잘 안 내려간다던데. 그리고 첫 해 겨울은 내게 정말로 추웠다. 물리적인 기온은 영상 3-4도를 웃도는데, 햇빛 한 점 없는 파리의 겨울은 내 마음을 얼려버렸다. 25제곱미터, 8평이 조금 안 되는 그 작은 방에서 나는 매일같이 울었다. 같이 사는 룸메이트 언니 앞에서는 웃으면서, 그 언니가 출근한 시간이 되면 나는 매일같이 울고 또 울었다. 왜 우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눈물이 쏟아졌다. 일주일에 집 밖으로 나가는 날은 손에 꼽았고, 그마저도 마트나 겨우 기웃거리던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파리에 살 붙이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3 단위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지치는 시기가 온다고 하더라. 3개월, 6개월, 9개월, 그 시기를 넘기고 나면 3년, 6년, 9년. 그때가 딱 3개월 고비를 지나고, 6개월 고비로 접어들던 기간이었다. 나는 늘 특별하고 싶었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에서마저도 나는 지극히 평범한 유학생 1일뿐이었다.


그날도 특별할 것 없는 날이었다. 출근하는 룸메이트 언니가 혹여 내가 잠에서 깰까 조심스레 침대를 나서고 욕실을 쓰고, 간단한 아침까지 먹고서 현관문을 닫고 나섰다. 나는 사실, 언니가 알람 소리에 눈을 뜨던 그 순간부터 깨어있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깨어있었다. 파리에서의 6개월이 가져다준 우울에는 불면이 포함되어있었는데, 나는 그 불면과 함께 찾아온 우울을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언니가 나가고,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깜빡였다. 천장이 눈 앞까지 내려왔다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죽어버릴 것 같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이 코 앞까지 다가왔고, 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아주 식상한 표현일지라도 그랬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그때의 나에게 공포라는 감각이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공포에서 달아나기 위해 몸을 일으키고, 샤워를 하고, 무작정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그리고 가장 먼저 오는 버스를 잡아탔다. 신이 도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버스가 파리 중심지로 나가는 버스였다는 것이다. 47번. 외곽의 칙칙한 풍경을 지나고, 파리로 진입한 버스가 중국인들이 모여사는 13구를 벗어나고 나서야, 파리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3개월 간 질리고 질렸던 그 풍경이. 익숙한 듯 어색한 파리의 풍경 위로, 거짓말처럼 반짝이는 햇살 한 줌이 내려앉았다. 잎도 없이 깡마른 가로수 가지 사이로 내려앉는 햇빛은, 내 평생 보았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꼭 하늘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선물처럼 내려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었지만, 나는 그 날 이후로 다시 살아갈 한 줌의 힘을 얻었다. 딱, 그 햇살 한 줌만큼의 힘을. 내가 파리에 있는 동안에, 숱하게 들었던 질문에 대한 답도. “파리에 왜 계속 계세요? 안 힘드세요?” 그 질문에 나는 수없이 같은 대답을 했다. “힘들어요. 그런데, 진짜 가뭄에 콩 나듯 너무 예쁜 순간이 있어요. 그 순간 때문에 버텨요.” 그 날의 햇살 한 줌은, 내게 그런 선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지치고 힘든 날이면 버스를 탄다. 창 밖으로 넘실대는 햇살 한 줌에 위로를 얻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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