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날 Aug 08. 2024

재생불량소녀가 되다.

나는 정말로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약간은 소심하고, 또 약간은 고집 있으며, 또 그렇게 그럭저럭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겪는 일들이 그렇게 평범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특별하다는 뜻은 아니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내가 겪은 일들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의 부모님은 내가 10살 때 이혼하셨다.

나는 아빠 밑에서 자랐는데, 아빠는 배를 타고 나가는 일을 하셔서 직업 특성상 한번 일을 나가시면 3~4일은 들어오지 못하셨다.

그렇게 되면 밥을 챙기고 집안일을 하는 건 우리 삼 남매의 몫이었다.

일을 나가시기 전 늘 한소끔 끓여놓은 곰탕으로 아침을 먹고 학교를 가곤 했다.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아침마다 늘 운동장 두 바퀴를 뛰게 하셨었는데 나는 그 시간이 정말 싫었다.

체력장 오래 달리기를 할 때마다 나는 늘 꼴찌였다.

6바퀴를 뛰어야 했다면 내 앞에 아이는 6바퀴째인데 나는 5바퀴째 일정도로 꼴찌여서 선생님은 내 앞에 아이와 함께 그냥 들어오라고 할 정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못 뛰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식사도 거른 채 아침에 운동장을 뛰었는데  다 뛰고 나니 세상이 핑핑 돌았다.

그리고 바로 쓰러져버렸다.

일어나니 선생님이 나를 양호실로 옮겨다 주었고 아빠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다.

부모님이 이혼한 이후로 나는 혼자 해결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아파도 잘 참고 이겨나가는 아이가 되었다. 그래서 아빠에게는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오늘 있던 이야기를 다 했던 것이다.

그날로 아침 운동장 뛰기는 없어져서 친구들에게 뜻밖의 선물을 주게 되었고, 나는 강제로 녹용을 먹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별다른 이슈 없이 학교생활을 했다.

약간의 이슈라면 늘 크고 작은 멍을 달고 살았던 것 뿐. 한번은 언니랑 싸우다가 다리를 맞았는데 그 부위에 엄청나게 큰 멍이 들어서 학교 갈 때 검은 스타킹을 신고 가야 할 정도였다.

그때는 '멍이 크게 들었나 보다'라고만 생각했지 내가 어딘가 아픈 아이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내가 고등학생 때는 학교로 헌혈차가 왔었다.

헌혈을 하면 간식을 줬기 때문에 친구들과 헌혈을 하러 달려간 적이 있다.

헌혈을 하려면 약간의 피를 뽑아 피 상태가 괜찮은지 확인했었는데, 내 차례에는 직원분이 너무 단호하게 헌혈을 할 수 없다고 말하셔서 너무 놀랐다. 나는 분명 건강한데 왜 헌혈이 안되는지 물어봐도 안된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나는 한번 생리를 시작하면 그 양이 어마어마해서 몇 시간만 지나도 생리대가 가득 찰 정도로 피가 많이 나왔었다.

또, 얼굴이 친구들보다도 창백하고 건강해 보이지 않았었었다.


그러다 일이 터져버렸다.


한창 대학입시를 위해 공부하던 고3 때였다.

늘 아침을 안 먹고 뛰면 일이 터진다.

학교에 가기 위해 전속력으로 뛰어 버스 앞에 섰는데, 나는 거기서 또 쓰러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쓰러지자마자 '쿵' 하는 충격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버스를 탔는데, 사람들로 빽빽한 버스에서 나는 쪼그려 앉아 숨을 고르며 겨우 학교에 도착했다.

아빠에게 이 상황은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전화드렸더니 바로 학교에 오셔서 시내에 있는 내과를 가게 됐다.


내과에서는 혈액치를 바로 확인할 수 있었기에 피를 뽑은 후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호들갑스럽게 나오시면서 혈액검사 수치가 굉장히 이상하다고 오류가 난 것 같다며 다시 한번 검사를 해보자고 하셔서 또 피를 뽑아가셨다.

다음 결과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는지 의사 선생님은 아빠에게 심각한 얼굴로,

"지금 당장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셔야 합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아니, 저 고3인데요? 수시 준비도 해야 하고 수능 준비도 해야 하는 바쁜 고3인데...

그리고 쓰러졌을 뿐이지 아픈 곳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난 아빠에게 전혀 아프지 않다는 것을 계속 어필하였으나, 나는 그날 서울로 떠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학교에 돌아가서 선생님에게 상황을 알렸고, 책을 바리바리 싸서 수도권 대학병원을 가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어리둥절했고 아빠는 심각했다.

다행히 경기도에 친척이 살고 계셔서 대학병원 진료 예약을 빠르게 도와주셨고 거기서 나의 엉망인 혈액수치를 마주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