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불량성빈혈을 판정받은 시기는 고3 여름이었다.
발병 후 입원하여 적혈구, 혈소판 수혈을 엄청나게 많이 한 결과 혈색소는 어느 정도 정상수치에 다다랐지만 혈소판은 여전히 2만 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혈액 정상수치 : 헤모글로빈 12~17, 백혈구 4천~1만, 혈소판 13만~40만
나는 담당교수님에게 대학교 입학을 위해서 올해는 공부에 전념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나의 고집 때문인지 혈액수치 상 혈소판을 제외하고는 수혈로 다른 수치들이 유지되고 있어서였는지 본격적인 치료는 수능 이후에 하기로 결정 났다.
다시 되돌아간 학교에서 나는 여느 또래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약간의 특혜였다면 아침 자습시간까지 등교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정도였다.
선생님께 만원버스를 타면 몸이 너무 힘들다고 말씀드리니, 그다음버스를 타고 와도 된다고 하셔서 매일 자리가 넉넉한 버스를 타고 여유롭게 등교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프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은 그 당시 나는 아프지 않고 이 병은 나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완치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병원에서는 두 가지 처방을 내려주셨다.
철분제와 피임약.
잠깐, 철분제는 알겠는데 이 나이에 피임약이라니?
생리 때마다 엄청난 생리혈로 인해 혈색소가 떨어질까 봐 피임약을 매일 먹으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피임약 관련해서도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처음에는 아빠와 함께 철분제와 피임약을 약국에서 사 왔었다.
피임약이 떨어지자 나는 약국에 가서 교복을 입은 채로 당당하게 피임약을 달라고 요청했다.
약사님은 굉장히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학생한테는 피임약 안 팔아."라고 하셨다.
약사님에게 지금 재생불량성빈혈로 의사 선생님이 피임약을 먹으라고 했다고 설명을 해도 전혀 믿지 않으셨다.
그렇게 또 나는 아빠에게 피임약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약사님의 반응이 당연한 건데 당시에는 내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는 약사님이 야속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나는 경기권의 한 대학에 수시합격을 했다.
수능 때까지는 매달 외래로 상태를 확인했는데, 기쁜 마음으로 수시에 합격한 것을 교수님께 말씀드렸더니 교수님께서는 내년에 대학을 가는 것은 무리라고 하셨다.
겨우 아빠 설득을 마친 대학입학인데 이번엔 담당교수님이 대학입학을 미루라고 하신다.
혈액수치상으로는 정상적인 대학생활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셔서 하신 말씀이셨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내년에 대학교 입학을 할 거야.'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수능이 끝나고 이제 직접적인 치료를 시작해야 했는데 재생불량성빈혈의 치료는 조혈모세포이식(골수이식) 또는 면역조절치료 방법이 있다.
교수님께서는 면역조절치료로 방향을 정하셨고 다음 해 1월 본격적인 입원치료에 들어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