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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영화 Jul 07. 2023

이토록 세련된 흑백영화

1940-60년대 고전 흑백영화 추천

 세상은 온통 컬러다. 까만 눈동자도 가까이서 보면 짙은 갈색이고 흰자위도 붉은 실핏줄로 가득하다. 그런 알록달록한 눈으로 보니 세상은 색깔에 속박될 수밖에. 그런 우리도 색의 통제에서 잠시 벗어난 적이 있다. 컬러 텔레비전이 가정에 보급되던 1950년대 이전, 흑백 영화의 대중화로 인해 사람들은 꿈마저 흑백으로 꿨다고 한다.


 색이 사라지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형태와 명암은 프레임 속 민주주의를 이룩했다. 주인공 자리에서 해방된 인물과 물건이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 자유롭게 노닐기 시작했다. 총천연색을 벗은 미장센 앞에서 관객은 본질에 바투 다가갔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그 이면을 느끼고 이해하게 된 것이다.


 여기 삶의 이면을 그린 세 영화가 있다. <멋진 인생>(1946), <밀회>(1945),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1960)는 각각 가장 따뜻한 정의, 슬프고 성숙한 사랑, 인생의 달고 짠맛을 흑백으로 담아낸다. 쏟아지는 컬러 콘텐츠들로 소란스러운 우리 눈에 잠시 고요한 색의 적막을 선사해 주는 건 어떨까.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 스틸컷.

 <멋진 인생>, 뿌린 대로 거두리란 삶의 농법


 1940년대 미국, 마을 규모의 조그만 은행을 운영하는 ‘조지 베일리(제임스 스튜어트 분)’는 파산 위기로 삶의 낭떠러지에 몰린다. 마을 경제를 독점하려는 사업가 ‘포터(라이오넬 베리모어 분)’를 저지하기 위해 숙원이었던 여행마저 포기하고 고향에 남았지만 포터의 야심은 결국 조지와 그의 회사를 무너트린다. 목숨을 끊으려던 찰나, 수호천사가 나타나 조지가 없었다면 황량하게 변했을 마을의 모습을 보여준다.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하는 <멋진 인생>에서 거리와 집을 밝히는 것은 형형색색 빛나는 조명도, 트리도, 상점도 아니다. 바로 전구만큼 희게 빛나는 마을 주민들의 얼굴이다. 흑백의 풍경 속에서 그들의 표정은 불안, 체념, 순종으로 어두워진다. 그러나 조지의 선한 영향력은 그들의 마음을 감사, 결심, 연대로 바꾼다. 마침내 그 얼굴들이 조지의 집에 모여 눈부신 하얀 빛으로 반짝거릴 때 관객은 ‘정의’의 가장 따뜻한 열기를 느끼게 된다.


<밀회(Brief Encounter)> 스틸컷.

 <밀회>, 실존과 윤리 사이에서 사랑이 소진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인간사 궁극의 테마다. 종, 신분, 시공간, 윤리적 딜레마를 넘어서 사랑은 언제나 이뤄져왔고, 또한 스러져갔다. <밀회>의 두 남녀는 각자 아내와 남편이 있는 몸. 그들의 만남을 허락하는 곳은 기차 승객이 잠시 머무는 역 내 카페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잠시 스치는 정류장 같은 존재이기에 두 연인의 밀회는 언제나 애달프고 아쉽게 느껴진다.


 소진(消盡)의 본질은 종국에 없어진다는 결말이 아닌, 없어지는 내내 맹렬히 불태울 수밖에 없는 고통에 있다. 실재하는 감정을 죽여야 하기에 역설적으로 있는 힘껏 불사르는 그들의 사랑은 우둔하지만 어딘가 우리와 닮았다. 대체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사랑, 야욕, 안주하려는 게으름, 포기하려는 비관까지도 우리는 끝의 끝까지 태워야만 비로소 삶의 다른 장으로 진입할 수 있다. 흑백의 연인은 그렇게 치열한 어리석음을 연료 삼아 하얀 빛으로 타오르고, 까만 재로 부서진다.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The Apartment)> 스틸컷.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겉피는 달라도 똑같은 인생살이


 뉴욕 보험회사 직원 ‘버드(잭 레먼 분)’는 소심하고 착실한 사람이다. 사욕을 채우기 위해 부하 직원의 집을 제 것처럼 쓰는 상사 때문에 자기 집에서도 눈치를 보며 사는 버드는 ‘프랜(셜리 맥클레인 분)’을 몰래 연모하고 있다. 자신의 상사와 연정을 나누는 여자가 하필 프랜이라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 프랜은 바람둥이 상사에게 버림받아 시름시름 앓아눕고, 버드는 고백하기를 망설이느라 입만 옴짝달싹 거린다.


 흑백영화는 진지하다는 편견은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한 편이면 깨지기 충분하다. 턴테이블, 브라운관 TV, 다이얼 전화기와 같은 시대적 상징물이 미모의 배우들 손에 이리저리 조작되며 아날로그만의 낭만을 북돋는다. 각본과 연출은 현대의 멜로드라마와 견주어도 손색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간편하고 피상적인 감정 소모에 지친 현대인에게 60년대를 살아가는 연인의 감정 교류는 애틋하고 저릿하게 다가온다. 통속적인 로맨틱 코미디 장르가 흑백 옷을 입고 현대인을 관능적으로 유혹하면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어디 있을까. 


 퇴근 후 혹은 모처럼 시간이 비는 주말 오후 허한 마음을 달랠 길 없을 때, 세련된 흑백영화로 하루의 마무리를 지어보는 건 어떨까. <멋진 인생>과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는 네이버 시리즈온에서 각각 1천 원과 2천 원에 평생 소장할 수 있고, <밀회>는 왓챠에서 감상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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