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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과 문인들, 나혜석‧이상화‧이육사

by 양문규

반일 비밀결사 단체 ‘의열단’은, 이들의 활약을 그린 『암살』· 『밀정』 등의 영화를 통해 세간의 관심을 일층 높였다. 영화 내용이 모두 사실은 아니라고 하지만, 나 역시 이러한 영화들이 흥행하면서 소설가 박태원이 쓴 『약산과 의열단』(1947)을 다시 읽어보게 됐다.


옛날 읽었을 때는 의열단의 수공업적 테러방식, 그리고 거듭되는 실패와 무가치해 보이는 희생으로 이뤄진 얘기가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떠올리면서 읽으니 의열단의 지난한 모의 과정과 그럼에도 실패로 귀결되는 안타까운 과정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특히 이러한 의열단의 활동을 해방이 되고 나자 박태원 같은 모더니스트 문인이 정리했다는 자체도 흥미로웠다. 박태원은 책 말미에 최초의 여성서양화가이자 페미니즘 소설 작가인 나혜석이 의열단과 관계 맺은 사연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어 더 흥미를 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중국 길림성 인근에서 결성된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위한 방략으로 국내외서의 폭력투쟁을 선택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외에서 폭탄, 총기 등을 제조, 구입하는 것 외에도, 이를 국내로 어떻게 무사히 반입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운반 경로 중 하나로 중국 천진에서 황해를 거쳐 압록강 연안의 안동현(단동)을 운행하는 아일랜드 무역상 쇼우의 ‘이륭양행’ 배편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국경도시 안동에는 당시 일본당국의 엄중한 수색과 감시가 이뤄지고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마침 나혜석은 1921년부터 오륙 년 간 총독부 관리인 남편이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발령받음에 따라 그곳에 가서 산다. 그때 일본 당국의 추격을 받던 의열단원 박기홍이 나혜석에게 단총을 맡긴 일이 있다. 부영사 부인이라 나혜석 집은 비교적 안전한 은닉 장소였을 것이다.


박기홍은 1923년 검거되고 형기를 마친 후 우연한 길에 나혜석을 찾는다. 그가 뜻밖이었던 것은 나혜석이 전에 맡긴 그 위험하고 불온한 단총을 그때까지 보관했다가 도로 내어준 일이다. 그녀는 의열단의 비밀을 위해 남편에게도 알리는 일없이 간직하며 지낸 것이다.


나혜석은 이미 결혼 전인 1919년 24세의 나이로 3·1 운동에 참가해 5개월의 옥고를 치른 전력이 있다. 그녀의 의열단 협조가 가능한 일이라 생각도 되나, 권총은닉이 만만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1920년대의 대표적 저항시인으로 불리는 이상화도 의열단과 직간접으로 관련돼 있다.


이상화 역시 3·1 운동 때 대구 학생 운동의 사전계획을 하다 발각되어 피신한 전력이 있다. 일본에 공부를 하러 갔다가 1924년 관동대진재로 인한 심경의 변화로 귀국하며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에 가담하는 등 일제의 감시를 받아오던 차였다.


그가 일제 관헌에 의해 피검당하는 것은, 1926년에 그 전모가 발표된 ‘경북의열단 사건’에 연루되면서부터다. 이 사건은 대구 출신 이종암이 주도한다. 이종암은 의열단 창립 당시 결사에 참석한 이들 중 하나이며, 1922년 상하이 황푸탄의 다나카 대장 저격 사건에도 참여한다.


국내로 잠입해 대구·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자금을 모으고 폭동을 계획하다가 사전 검거됐는데, 대구 사람인 이상화가 이 사건에 연루됐던 것이다. 이상화는 무혐의로 풀려나긴 하지만 이 시기 그의 시들에는 의열단원에게서 볼 수 있는 투지와 결기 등이 엿보인다.


“새 세계를 낳으려 쏘댄 자욱이 시가 될 때에 – 있다/ 촛불로 날아들어 죽어도 아름다운 나비를 보아라(”「시인에게」 중), 보아라 오늘 밤에 하늘이 사람 배반하는 줄 알았다/아니다 오늘 밤에 사람이 하늘 배반하는 줄도 알았다.(「역천」 중)


안동이 고향이고 대구에서 활동하던 이육사도 1925년 22세 때, 의열단 등의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던 이정기와 함께 비밀 결사를 만들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1927년 첫 옥살이를 시작한 이후 17회의 투옥 끝에 결국은 북경에서 옥사한다.


이육사는 1932년에는 과거의 의열단장 김원봉이 중국에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기도 한다. 이 학교는 탄약, 폭탄, 뇌관 제조법 등을 비롯한 군사학을 가르치면서 혁명 간부를 길러낸다. 의열단원 출신 이동화는 이곳서 폭탄 제조법 교관으로 활동한다.


대개 의열단원은 멋진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머리를 잘 손질해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언제나 이번 사진이 죽기 전 마지막 찍는 사진이라 생각했단다. 그러고 보니 현재 남아있는 이육사의 사진도 그렇다.


육사는 자신의 수필 「계절의 오행」(1938년)에서 자신은 유언 같은 건 쓰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그에겐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뿐인데, 시를 쓰는 것 역시 하나의 행동이라 생각한다. 그가 독립운동이라는 형극의 길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의열단장 김원봉(좌측)과 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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