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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grid Jin Apr 25. 2021

평신도로서 그리스도교를 바라보는 나의 소소한 관점

가장 신본적인 것이 가장 인본적인 시대가 올까?

매주 지인들에게 편지를 쓰는데 글 하나를 공유해보고자 합니다. 배경사진은 현대신학자 본회퍼입니다.

지난 화요일에는 어느 군종목사님과 저녁을 함께 했습니다. 아이가 한 명 있으신데, 초등학교 2학년인가 봅니다. 아주 귀엽더군요. 아빠 말을 참 안 듣던데, 목양실에서 목사님과 함께 대화하는데 자꾸 아빠 말을 듣지 않고 무슨 티격태격하고. 스마트폰 달라고 하고. 뭐 그런 걸 보면 참 화딱지가 나겠다 싶으면서도 꾹 참아내는 그러한 사랑과 애정이 있지요. 우리 엄마한테는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어요. 나를 왜 낳았냐구요. 엄마 말로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는 사고도 안치고 참 귀여운 아이였대요. 그러다가 중학교 넘어가면서부터 일을 만들기 시작했다구요. 그렇게 말해도 나를 얼마나 이뻐하고 사랑하실까 합니다.

이러한 자식사랑, 부모사랑, 내리사랑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요? 단순히 본성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나의 존재, 우리 인간의 존재가 빈약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종을 보존하기 위하여 선택된 행동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인간이 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가진 사랑이란, 본성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 거룩한 의미와 뜻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요. 이건 저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종교에서, 신에서 그 해답을 찾아왔습니다. 나름의 답정너인 셈이지요. 신으로부터 나온 온유의 감정, 사랑의 방법이 인간에게 전수되었다. 신플라톤주의적으로 이야기하면, 신이 가지고 있는 완전한 사랑과 선의 개념이 인간에게 불완전하게 분유되어(나누어져서) 왔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저는 신학의 의미가 바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장 신본주의적인 것, 즉 신적 존재를 바탕으로 세상을 해석하려는 태도가 가장 인본주의적, 즉 인간을 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하려는 태도라고 봅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허무함과 무너짐이 신적 존재를 호출하도록 만드는 것이죠. 케케묵은 신학을 다시 끄집어내려는 움직임은 앞으로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도래하며 모든 규범이 무너지고 상대적인 가치만이 의미가 있다는 회의론이 퍼지고 있습니다. 당장 도지코인이 왜 떡상하나요? 우리가 생각하는 모더니즘의 사고에 따르면 가격 상승과 하락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인하여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결정됩니다. 하지만 도지코인은 대체 무슨 가격이 있나요? 시바견이 시바 존나 귀엽다 이것밖에는 내재적 가치가 없는 것 같네요. 일론 머스크가 도지! 한 마디만 트위터에 올려도 떡상을 하는 시대에 과연 무슨 규범적인 사고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측 가능하면서도 안정적으로 온유하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저는 신적 존재를 전제하고, 우리가 신적 존재로부터의 부름(calling)을 받고 신적 존재가 갖고 있는 완전한 사랑과 온유의 정서를 이 세상, 이 땅에 실현하는 거룩한 일을 하고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네, 그리스도인이라면 바로 아실 수 있겠습니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가 마태오 복음서, 마가의 복음서, 루카의 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하나님 나라가 바로 이 땅에 있다, 단지 여러분이 모를 뿐이다" 라고 선포하는 바탕이 됩니다. 따라서 진정한 신학인,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자가 갖고 있는 완전한 선을 이 세상에서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는 아주 실존주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군종목사님과 만나게 된 연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십자가를 진 두 강도의 비유(루카의 복음서 23장 24절 내외)' 설교를 듣고 난 이후에서 였습니다.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한 강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했으나 한 강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죄가 없다, 라면서 회심하는 듯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마태오 복음서 27장 44절에 따르면, "두 강도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했다"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무엇이 진실일까요. 한 강도만 비난한 것일까요, 두 강도만 비난한 것일까요? 많은 목사는 루카의 복음서에 더 집중해서 한 강도는 사실 (마태오 복음서의 구절과는 달리) 실제로 회심했다. 회심한 자에게 복이 있다. 뭐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하는데요. 군종목사님의 설교는 좀 달랐네요. 거의 처음 들어본 해석인 것 같은데요. 마태오 복음서에 방점을 찍어서, "사실 둘 다 죄인이고, 회심한 강도는 없다. 회심한 척하는 것일 뿐" 이라는 해석을 하였죠.

그리스도교 전반에 걸쳐 인간은 존재의 모태가 된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객체이므로, 그 객체는 존재 그 자체로부터 떠났으므로 죄를 지었다라고 해석하지요. 그러므로 죄를 지은 자는 다시 존재에게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 이들은 모두 죄인입니다. 두 강도 역시 죄인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고, 말 한마디 한마디는 위선이자 가식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꽤나 신선하면서도 설득이 되는 해석이었습니다.

여튼 돌아옵시다. 우리는 성경을 한 점 모순이 없는 경전일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러한 생각을 가진 기독교 신자를 많이 보아왔을 것입니다. 이를 성서무오설 - 즉 성서에는 아무런 오류가 없다 - 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성서무오설은 쉽게 논박이 가능합니다. 애시당초에 성경은 원본이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구전으로 듣고 사본으로 본 것을 베낀 것들이 대대손손 내려오는 것에 불과합니다. 2세기 사본과 3세기 사본이 다르지요. 이문이 있다고 합니다. 표현과 단어가 다릅니다. 어떻게 신이 작성했다고 하는 경전에 원본이 없어서 사본 검증이 불가능하고, 심지어 사본들끼리도 서로 모순과 차이가 상당히 있을까요? 이러한 경전을 우리가 어떻게 신뢰하고 믿을 수 있을까요? 하는 물음이 던져집니다.

이러한 문제를 공관복음서의 불일치 문제라고 부릅니다. 사실 저는 성서 자체를 어떠한 무오한 서적이라든지, 완전한 역사서라든지, 이렇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성경 그 자체는 하나의 스토리,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거기에서 어떻게 우리가 교훈을 끌어낼 것인가? 실존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 하루하루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을 해야지 문자 하나하나를 온전히 믿는다는 것은 성경에 대한 우상숭배라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성서가 오랜 시간 대중과 호흡하며 생명력을 가져왔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고 느낍니다. 일반 대중들이, 민중들이 사본을 필사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의도에 맞게 편집되거나 수정되거나 추가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고 (누가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후대에 추가되었음), 확실히 가장 신본적이라는 종교가 가장 인본적인 과정을 통해 작성되었다는 아주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상황이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역설이 우리가 그리스도교를 바라보는 신학적 스펙트럼을 더욱 넓혀줍니다. 예를 들어 마태오 복음서는 유대인을 설득하기 위하여 당시 유대교 율법과 비교하여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설득하는 의도를 갖고 작성된 책입니다. 누가는 복음서 저자 중에서 유일한 비유대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여성, 소수자들이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에피소드를 많이 작성했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비롯되었던 사회주의 사상을 띄는 '해방신학' 은 구약성서의 욥기와 신약성서의 누가복음에서 착안하였지요. 민중이 무언가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라는 논리를 누가복음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제기하는 퀴어신학이나 해방신학 등도 이러한 관점에서 태동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물론 저는 합신•칼뱅주의 교단에 있기에 자유주의 신학과 어떻게 정반합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는 합니다.

여튼 사복음서가 서로 구술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은, 성경이 완전히 무오하면서도 이성적인 저서는 아니지만 한 편으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이기도 합니다. 역사적 시대와 지역적 색체에 따라, 다양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해석하여 당대한 문화적 현실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성서가 생명력을 갖고 2000년 넘게 생존할 수 있게 하는 힘이라고 봅니다. 바트 어만과 같은 성서비평학자들의 고등비평이 의미가 있으면서도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해칠 수 없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독자 대부분이 재미없어 할테지만,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겁니다. 그래도 결론을 내야겠네요. 히브리인에게 보낸 편지(히브리서)를 보면 인간의 삶은 참으로 실존적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름을 받은 피조물이고, 그렇기 때문에 죽지 않고 하루하루를 가치있게 살아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루하루 완전한 선이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조금이나마 닮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만들어갈 수 있도록 인간의 자유의지에 입각하면서도 주님의 소명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가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앞서 그리스도교는 존재의 본질(신/하나님)을 떠나 선이 결핍된 상태로 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가르친다 했습니다. 우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존재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선의 풍성함으로 가득찰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이 세상을 살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제 생각에 그리스도교가 주는 가장 큰 교훈이자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내세에 있을 무슨 구원이니 천국이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인간의 과거를 알고 현재를 지배하며 미래도 정해놓을 세상 속에서 인간 존재의 귀중함은 역설적으로 신적인 존재를 가정함으로서 찾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혹자는 종교가 현대 사회에서 소멸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종교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기능을 하냐? 아마 여기 독자분들 뭐 많이들 동감하시죠? 실제로 Berger, 1999에 따르면 사회학에서 대개 종교의 소멸을 진단했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 들어와서 첨예한 사회의 갈등에서는 종교가 그 선봉에 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장 김수환 추기경이 우리나라 민주화에 큰 역할을 하신 것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지요. 하버마스는 현대사회가 세속화 사회가 아니라 후기 세속화 사회라고 평하기도 했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케케묵은 신 존재에 대한 증명이나 그러한 담론보다는 종교가 어떻게 우리 사회에서 구성되어 있는 지에 대한 담론을 펼칠 필요가 있습니다. 여튼 이러한 이야기를 목사님과 나눌 수 있어서 가치있고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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