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아닌 환경을 바꾸는 것
“여러분의 작업물은 예상 가능한 범위예요. 무슨 말이냐면, 여러분의 작업은 사용하는 도구와 그 툴을 다루는 방식에 제한되기에,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예측할 수 있다는 거예요. 무슨 툴로 작업하셨나요? 일러스트레이터겠죠. 마우스를 쥐고, 혹은 트랙패드로 도형을 만들거나 펜툴을 사용하여 앵커 포인트를 생성, 조정하면서 윤곽을 그리고 다듬었겠죠. 벡터 환경이니 형태를 자유롭게 그릴 수 있다구요? 아뇨, 그 환경에 갇힌 거예요.” 철판으로 된 강의실 밖 벽면엔 학생들의 타이포그래피 과제들이 엉성하게 붙어 있고, 교수님은 첫 피드백 중이다. 2m 남짓 되는 폭의 복도 사이로 조금 쌀쌀한 긴장감이 외풍과 함께 흐른다.
이번에도 방법론인가? 요즘 죽 고민해 마지않던 것. 얼마나 많은 디자이너들이 공감할지는 모르겠지만, 디자인을 할 때 종종 하게 되는 착각이 있다. 일종의 자기과신인가도 싶은데, 바로 실제 체험을 등한시하고 머릿속의 시뮬레이션으로 대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예를 들면 콜라주 Collage 기법은 실제 종이를 오리고 붙여야 하지만, 우린 상상을 통해 재료를 구하고 종이를 만지고 가위를 다루고 풀을 바르는 행위를 생략한 후 사용성 좋게 잘 빠진 그래픽 툴에서 결과를 도출하곤 한다. 그도 그럴게, ➊ 대략적인 아웃풋은 비슷하게 나올 것이고, ➋ 실제 종이를 사용하면 Ctrl+z가 불가능해 불편할 뿐만 아니라, ➌ 우리 집엔 풀도 없고, ➍ 어차피 최종 작업물은 컴퓨터로 가져와 포토샵에서 다듬어야 하기 때문이다. 번거로움을 버리고 효율을 취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가 싶지만, 사실 전제 ➊ 부터 틀렸다.
"글자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가장 기본이 되는 것". 교수님의 질문이 이어진다. 머뭇거리다 하나 둘 떠오르는 것을 던져 본다. "캐릭터? 특징이 되는 부분이요.", "컨셉?", "그리드.", "픽셀? 네모칸?", "작업자의 의도 아닐까요". 답변 역시 이어지지만, 교수님은 더 끌어내보라는 듯 애매한 웃음을 짓는다.
“글자를 만드는 건, 가장 기본이 되는 한 획을 긋는 것에서 출발해요. 이 한 획에서 모든 게 시작되죠. 서체의 발전 과정을 보면 이해하기 쉬운데, 이 변천은 환경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졌어요. 사용할 수 있는 도구, 당시의 시대 상황 등의 영향을 받았죠”. 교수님은 강의를 이어간다. “중세 블랙레터의 획을 보면 납작한 펜의 형태적 특징과 사람의 손으로 쓸 때 나타나는 움직임이 녹아 있어요. 텍스투라 Textura에는 평행이동이, 프락투어 Fraktur에는 회전이동이 나타났죠. 이후 필압이 반영되는 쓰기 도구가 나왔고, 휴머니스틱 Humanistic 서체엔 획 두께의 차이가 생겼어요”.
당시의 글씨체는 손글씨의 속성이 강했다고 한다. 금속활자가 등장했지만, 여전히 글자체는 손글씨의 형태를 그대로 답습했다. 새로운 개념이 등장해도 인간이 그것에 맞는 고유한 방법을 찾아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덕분에 신문물엔 인간이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관념이 입혀지는데, 예를 들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지만 우린 그것을 내용을 보는 것이기에, 웹 '페이지’라는 이름을 붙인 것과 일맥상통하다(홈페이지, 하이퍼 텍스트, 북마크. 당시 사람들이 이 신통한 문물을 어떤 시각으로 봤는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글씨체에서 손글씨적인 특성은 천천히 조금씩 사라져 갔는데, 나름의 굵직한 변화는 약 100년 단위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모더니즘이 태동하고 건축이 발달한 시대가 도래해서야 타이포그래퍼들은 새로운 관점으로 서체를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서체를 도면에 작도하듯, 도형을 이용해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지오메트릭 한 푸투라 Futura, 네오그로테스크 계열의 헬베티카 Helvetica가 대표적이다. 포스터 광고가 중요한 시대엔 다른 홍보 문구들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기 위한 장식적인 서체와 슬랩세리프체 Slab serif가 등장했고, 저널리즘이 대두된 시대엔 신문의 한 지면을 다채롭게 채우는 ATF(American Type Founders)의 서체 패밀리가 등장했다. 컴퓨터가 발명되고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해상도가 낮았기에 픽셀로 찍은 서체가 등장하기도 했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노토산스 Noto sans로 대표되는 웹폰트가 유행을 탔다. 크롬과 안드로이드를 소유한 구글은 본고딕을 무료로 배포해 스텐다드를 점유하고자 했다. 요즘은 모바일 디바이스와 같이 가로 폭이 좁은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장체에 가까운 서체들이 나타나고 있다.
사용하는 도구와 서체가 얹어지는 매체, 그때의 상황 등이 서체 디자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어느새 서체를 그리는 도구는 첨필과 펜에서 마우스, 트랙패드로 넘어왔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펜툴로 그리기에 생기는 특징들이 요즘 폰트들에 나타나고 있는 것. 이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그래야만 맥락을 알고, 다른 시도를 할 수 있으니까. "이 역사적 흐름을 듣고 나니 여러분들의 작업이 달리 보이지 않나요? 상투적이지 않은 새로운 표현을 하려면 생각을 달리하는 게 아니라 환경을 바꿔야 합니다." 흐름대로, 하던 대로 만들면 상투적인 게 된다. 우리의 작업에도 역시 '상투적'이 배어있는 듯했다. 환경을 바꿔야 생각도 바뀐다는 의미일까? 역시나 쉽게 보이는 길은 없다. 일단은, 자판과 마우스에서 손을 떼어 본다.
*교수님의 대사에 상당한 각색과 의역이 들어갔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