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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지하다 Apr 18. 2023

32만 원이라고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명품수선

나는 명품 가방에 큰 관심이 없다.

내가 억대 연봉을 받는 날이 오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볼 순 있겠지만, 현재 승무원의 월급으로는 아니다.

나보다 월급이 적은 사람들도 명품 가방을 할부로 쓱쓱 잘 긁는다지만,

사람은 모두 우선순위와 선택의 기준이 다를 뿐이니까.

어떤 명품들은 이 물건이 당신의 가치를 말해준다고 광고하지만, 나는 내 월급의 몇 배가 되는 가방조차도 누군가의 가치를 말해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투자'라는 시선에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떤 가방들은 중고여도 가격이 오르는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내 투자 포트폴리오에 명품가방은 없다.


지금은 이런 나지만, 전 항공사를 다닐 때 한창 소유욕이 나를 지배하던 시기가 있었다.

쇼핑을 통해, 사막 사는 외로움과 엄격한 무슬림 회사에서 월급과 신성한 개인의 자유를 교환하는 내 모습을 잊고 싶었던 것 같다. 전문용어로 'C발 비용'이라는 말까지 생겼으니,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많았나 보다.


그래서 입사 초반에,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비행을 가서 루이뷔통 스피디백을 지른 적이 있다.

가방을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간 비행도 아니었는데, 루이뷔통 매장을 보는 순간 들어가서 그냥 사버렸다.

정말, "아, sㅣ발! 몰라"였다. '^^l발비용'이라는 단어가, 음성학에 근거해 지어졌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이제 번듯한 직장도 있고, 어엿한 성인이니 나를 위한 '입사 선물' 정도로 생각하며 손을 떨면서 질렀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나는 만 25살이었고, 택스환급을 받고 나니 85만 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요즘 가격을 보니 2백만 원이 넘는 걸 보면 명품 세계에서는 다른 경제시스템이 작동해 인플레이션을 낮추는 제도적 장치가 없는 듯하다. 그것이 유일하게 내가 수전증을 겪으며 산 명품가방이었다. 잘 들지 않아 오래전 엄마에게 주었는데 엄마도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나에겐 또 다른 명품가방이 있는데, 100유로짜리 버버리가방이다. 짝퉁 아니고 진짜인데, 어떻게 100유로냐고? 2017년, 핀란드 헬싱키의 벼룩시장에서, 어떤 인상 좋은 중년의 아주머니에게 산 중고가방이다.


아주머니는 Stockmann(헬싱키의 유명 백화점)에서 몇십 년 전에 샀다며, 정품인 것은 자신이 보증한다고 하셨다. 하하하. 아줌마를 믿는 것만이 제 유일한 보증서네요? 가방을 샀을 때 담겨있던 버버리 천가방까지 같이 보여주셨고, 그 당시 내 핀란드 남자친구는 핀란드 사람들의 가장 높이 살 점은 '정직함'이라고 누누이 말해왔기에 나는 그 아주머니를 믿고 선뜻 100유로를 내밀었다. 빈티지함이 느껴지는 가방이라 예쁘게 잘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정품인 것은 사실이었으나 아주머니께서 그다지 정직하지 않으셨던 부분은, 안가죽이 헐어서 물건을 넣으면 가죽 부스러기가 엄청나게 묻어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가방을 쓰기를 포기하고 6년을 묵혀두었다. 그러다 며칠 전부터 자꾸 이 가방 안가죽을 수선해서 들고 다니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디자인도 예쁘고 빈티지함에서 오는 유니크한 매력이 있었다.


몇 달 전, 동네 큰 쇼핑몰에 갔을 때 명품 수선집의 번호를 찍어왔고, 나는 '한 5만 원이면 되려나? 아무리 비싸도 10만 원 정도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맡기려고 했다. 내 명품계 세상물정은 까막눈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혹시 모르니 전화를 해보고 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셔서 사진을 보냈더니 32만 원이라는 게 아닌가?


이렇게 안가죽이 헐어있다.


"네? 32만 원이요???"

"명품수선이 원래 인건비가 높아요, 손도 많이 가고..."

"현금으로 하면 좀 할인해 주시나요?"

"현금으로 하면 30만 원까지 해드릴게요."

"아... 25만 원에 해주시면 안 될까요? (사실 이 돈 주고 고쳐야 할지 확신은 없지만, 일단 던졌다.)"

"명품수선은 원래 1,2만 원 깎지 그렇게 많이 못 깎아요."

"제가 샀던 가격보다 비싸서요... 생각해 보고 방문하겠습니다."


그 당시 100유로는, 환율도 낮아서 13만 원 정도였다. 13만 원에 산 가방을 두 배가 넘는 가격에 고쳐야 할까?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까???

다행히 명품수선 전문 앱이라는 게 있길래 다운로드하여서 견적을 내보니 25만 원에 해주겠다는 곳이 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어떤 것이 현명한 것일까? 100유로를 매몰비용으로 생각하고 이 가방을 계속 묵혀둘 것인가,

구매 가격의 두 배가 되는 가격에 수선을 하고, '(낳을지 안 낳을지도 모르는) 딸한테 물려주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오래도록 고이고이 쓸 것인가...?

아마 내가 이 가방을 정가에 샀다면, 그래! 비싸게 샀으니 30만 원 정도야. 하고 쉽게 고쳤을 것 같다.

하지만 13만 원에 산 가방에 25만 원을 투자해야 한다니...


간만에 큰(?) 고민을 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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