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헤미안 Lyn May 17. 2020

VVIP 자격을 잃었다

너와 함께 한 지난날

  어제 오후, 책상 정리를 하다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것이 있었다. 더 이상 쓸모없는 VVIP카드였다. 보름 전 마지막으로 카드를 사용하고서는 아쉬운 마음에 차마 버리지 못하고 책상 한편에 간직하고 있었다. VVIP자격을 잃게 된 아쉬움도 물론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학생 때부터 십여 년이 넘게 함께한 인연이, 그리고 추억이 그 멤버십 카드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학생 때부터 영화를 즐겨 봤다. 120분짜리 영화 한 편이 때로는 내 마음을 조용히 위로해주고 때로는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끼게 해 주었으며 때로는 미처 몰랐던 세상의 부조리함을 알게 해 주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만나는 세계와 집에서 TV 프로그램을 통해 만나는 세상도 물론 좋았지만 주위 어느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2시간 동안 오롯이 집중하게끔 하는 깜깜한 극장은 나를 온전히 다른 세상에 빠져들게 했다.


처음에는 내가 좋아했던 액션이나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지만 차츰 기분이 좋아서, 기분이 좋지 않아서, 또는 기분이 적당해서 시간 날 때마다 영화관을 찾았고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영화를 관람했다. 특히나 CGV에는 '아트하우스'관이 따로 있어 예술영화나 저예산 영화, 또는 대중적인 소재를 다루지 않은 소위 비주류 영화를 상영했는데 그 덕분에 더더욱 영화관을 자주 찾게 되었다.


그리고 이 아트하우스 상영관이 나를 어느덧 CGV의 충성 고객이 되게 했다. 블록버스터 영화가 화려한 볼거리로 시선을 사로잡는다면 아트하우스 영화는 비교적 소소하지만 다양한 시각으로 주제를 전달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때문에 어느샌가부터는 지구를 지키고 재난을 이겨내며 악당을 물리치고 가슴이 미어지는 사랑을 외치는 영화보다는 소소한 행복을 찾는 이야기나 예술인의 비하인드 이야기, 특정 장소나 물건이 주제이거나 대중적이지 않은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영화에 관심을 더 가졌다.


특히나 아트하우스 영화관은 늘 비어있는 좌석이 많아 뒷사람의 발차기나 옆사람의 팝콘 소리에 방해받지 않고 편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아트하우스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혼자 조용히 영화를 즐기려는 사람들이기에 영화관에 들어서면 여기저기 간격을 두고 떨어져 앉아 조용히 영화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고 간식을 섭취하거나 대화하는 사람들이 없어 영화 상영 중에도 전혀 방해받지 않았다.


한편 나는 낮보다는 밤 시간대를 선호했는데 특히나 차를 구입하고부터는 심야영화를 자주 보러 갔다. 이동에 제한이 없으니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심야영화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츄리닝 바지와 후드티에 슬리퍼를 신은 채로 그렇게 누가 봐도 심야 혼영을 하는 모습으로 영화를 보러 갔다. 심야 영화에다 비인기 영화인 경우 관객이 나를 포함해 두세 명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는데, 덕분에 나도 자세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편하게 관람했고 뒷사람이 없을 경우 팔다리 스트레칭도 해가며 마치 집에 있는 듯이 편하게 관람했다. 아마도 심야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은 바로 이 사람 없는 상영관에서 편하게 영화 관람을 하는 즐거움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게 십여 년간 열심히 영화를 본 결과, 정확히는 결제를 자주 한 결과, 나는 작년까지 VVIP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어해 전부터는 급격히 저하된 체력과 심신의 피로감으로 평일은 물론이거니와 주말에도 영화관에 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어쩌다 정말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 한 번씩 가게 되어도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고 그렇게 잔뜩 기대를 품고 보러 갔다가 비몽사몽 허무하게 극장을 나오곤 했다.


그렇게 현저히 줄어든 구매실적으로 인해 결국 올해부터는 VVIP자격을 잃게 되었다. 재작년에도 부족했던 내 구매실적을 회사에서 단체로 영화를 보러 간 덕분에 겨우 메꾸어 등급을 유지했는데 더 이상은 무리였다. 극장에 가는 것이 귀찮아진 데다 여러 플랫폼에서 제공하는 다양하고 재밌는 영상 콘텐츠들이 넘처나자 영화를 자주 보지 않게 되었다.


영화를 보는 대신 넷플릭스나 유튜브에 접속하는 횟수가 많아졌고 가끔씩 꼭 보고 싶은 영화도 극장 상영기간이 끝나자마자 집에서 TV로 유료 시청했다. 언제 어디서든 시청 가능한 편리함과 합리적인 구독 가격,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고객들의 입맛에 정교하게 맞춰진 방대한 콘텐츠에 나 역시 어느덧 집에서 또는 카페에서 여러 매체를 옮겨 다니며 손쉽게 영상을 즐기게 되었다. 특히나 코로나가 장기화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보건위생 관점에서도 영화관에 가는 것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  






약 보름 전인 4월 29일, 부처님 오신 날을 하루 앞두고 나는 부랴부랴 극장으로 향했다. VVIP자격은 작년 말까지였지만 그 혜택 중 하나인 '1 DAY FREE PASS'(하루 동안 일반관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횟수 제한 없이 무료로 볼 수 있는 VVIP 혜택 중 하나)는 금년 4월 말까지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간 코로나로 방문을 미루다 보니 결국 기한이 다되어서야 어쩔 수 없이 극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왕 방문하는 김에 가급적 많은 영화를 보고자 오전부터 영화관을 찾았다. 하지만 코로나로 관객이 줄자 상영하는 영화가 극히 제한적인 데다 아트하우스관을 비롯한 특별관의 영화는 시청할 수 없었기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시간이 겹치지 않는 '기생충 흑백판'과 '라라랜드', 그리고 '나의 청춘은 너의 것'까지 3개를 겨우 연달아 보았다. 작년에는 하루 종일 5편을 봤었는데 이번에는 3편이 최선인 듯했다.


'기생충'과 '라라랜드'는 이미 흥행이 검증된 대작인만큼 다시 봐도 충분히 몰입해서 볼 만큼 재미있었고, '나의 청춘은 너의 것'은 전형적인 대만표 로맨스답게 줄거리와 극의 전개는 쉬이 예상되는 단순한 구조지만 등장 배우들과 그들의 연기가, 그리고 극의 연출이 귀엽고 따뜻해서 지루한 줄 몰랐다.






넷플릭스, 왓챠, 유튜브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매일 콘텐츠를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소형 빔 프로젝트 등으로 홈 시어터가 인기를 끌면서 영화관을 찾는 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십여 년 전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할 때만 해도 백화점 내 영화관의 경우 열명 남짓의 매표 인력이 투입되고도 대기손님이 300명씩 있을 때도 있었다. 눈 앞에 가득 서있는 붐비는 인파를 보며 다들 주말에 영화만 보는 것이냐며 같이 일하는 친구에게 하소연하고는 했었는데 요즘은 어느 극장을 가도 대기손님이 거의 없다. 매체의 발달, 대중의 취향과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 속에서 나 역시 그러한 변화를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끔씩은 영화관에 가고 싶다. 시야 가득 채워지는 대형 스크린과 생생한 서라운드 음향설비, 달콤 고소한 팝콘과 오징어, 그리고 과하지만 않다면 같이 깔깔 웃고 눈물도 흘리며 공감하는 내 옆의 관객들이 가끔씩은 그리울 것 같다.


그렇게 지난날 영화관과 함께 했던 모든 날이 좋았다.




*커버출처: https://pixabay.com/ko/vectors/%ED%83%9C%EA%B7%B8-vip-%EC%A7%90-%EA%B0%80%EB%B0%A9-3256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