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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microambitious Oct 15. 2021

[오징어게임] 프론트맨 책상의 비밀

[오징어게임]을 통해 보는 모더니즘의 세계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징어게임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은 크게 세 분류로 나뉜다. 생존을 위해 게임에 참가한 플레이어들, 게임의 기획자들, 게임의 운영자들. 형사 준호는 극중 이 세 부류에 해당하지 않는 유일한 자, 이 게임의 외부에서 침입한 관찰자다. 그로 인해 게임에는 균열이 생기고 인물들은 구원의 기회를 맞이하지만, 결국 이 게임의 프론트맨이자 그의 친형이었던 인호의 총에 맞아 절벽에서 떨어지며 그의 계획은 좌절된다.   


드라마 전개상의 위기와 극적 긴장감을 책임지는 일 외에, 그에게 주어진 또 한 가지 중요한 역할은 관객들에게 이 작품의 주제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준호가 실종된 형을 찾기 위해 찾아간 고시원의 책상에서, 우리는 대체 왜 이런 빌어먹을 게임이 시작됐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이렇게 이 게임에 열광할 수 밖에 없는 지에 대한 이유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형인 프론트맨 인호는 동생과 같은 경찰 출신이지만 2015년 불명의 계기로 오징어게임에 참여하고 우승한다. 이후 고시원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그가 실종되자 신장을 나눠줄 정도로 가까웠던 동생 준호는 필사적으로 형을 찾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그가 찾아간 곳은 형이 머물던 고시원. 준호의 시선을 따라 인호의 방을 훑던 카메라가 제일 먼저 멈춰 선 곳은 인호의 책상 위였다. 그의 책상 위에는 라캉의 <욕망이론>과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화보집이 놓여 있다. 그 뒤로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까뮈의 <이방인> 등도 보인다. 매트릭스 1편에서 워쇼스키 자매(당시엔 형제)가 의도적으로 네오의 책 (보드리야르의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을 보여주는 장면의 오마주인 이 장면은 이 게임을 계획한 자들과 참여한 자들, 그리고 운영한 자들의 동기를 노골적으로 암시한다.

 

라캉, 마그리트, 니체와 까뮈는 모두, 현대라는 낯설고도 부조리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저마다의 해석을 내놓는데 골몰한 철학자들이었다. 17~8세기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을 목격한 인류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이 이룩해낼 수많은 성취와 찬란한 미래를 꿈꿨지만, 그 문명의 발전 끝에 인류가 마주한 것은 극한 자본주의 경쟁 속에서 소외된 인간, 첨단의 대량살상무기와 아우슈비츠 등의 참혹한 현장이었다.


르네상스 인본주의의 발현 이후 꾸준히 추앙 받아온 인간의 이성과 판단력이 사실상 그리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당혹스러운 진실 앞에서 인류는 크게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신은 죽었다’며 이전의 가치들과의 단절을 선언한 니체, 신의 뜻 따위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인정하기로 한 까뮈,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그려낼 길이 없어 불가해한 현실을 마음의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기로 한 마그리트, 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존재라며 끝내 이성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부정한 라캉. 이들은 모두 박탈당한 과거를 그리워하며, 현대라는 광야에서 ‘여긴 어디? 나는 누구?’를 외치며 혼란스러워하는 우리, 현대인의 대변자들이었다.


그리고 <오징어게임>은 바로 이들이 이해하려 애썼던 현대, 즉 이 부조리한 세계의 이미지를 콜라주해 창조해낸 현대 세계의 은유다. 눈이 가려진 채 어딘지 모를 곳에 떨어진 플레이어들은 아무런 의미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실존적 인간의 원형에 다름 아니며, 그들이 모여서 벌이는 게임은 공정하고 단순한 규칙들이 지켜지고 승패가 명확한 게임을 즐기던 어린 시절, 즉 현대 이전의 세계에 대한 노스텔지어다. 똑 같은 유니폼과 제복으로 서로가 구분되지 않는 군중의 모습으로 그려진 플레이어와 운영자들 역시 마그리트의 그림 속 검은 옷을 입은 신사들의 이미지와 겹친다. 이 놀이에 참여한 사람들은 막대한 부를 향한 욕망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를 이 잔혹한 경쟁에 내던진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고유의 특질로 알려졌던 이성과 합리성은 이 저속한 욕망의 질주 속에서 남보다 앞서가기 위한 도구로 활용될 뿐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I think, therefore I am)고 선언한 데카르트의 말을,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I think where I am not, therefore I am where I do not think.)고 고쳐 썼던 라캉의 도발이 보기 좋게 실현된 셈이다.  


모든 좋은 드라마에서, 무대는 세계의 은유이며 배우는 인간의 은유다. <오징어게임>이 좋은 드라마인 이유는 이렇듯 복잡하고도 광범위한 모더니즘의 세계관을 너무나 단순하고도 명징한 이미지들로 은유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각종 이미지와 파편적 이해가 넘쳐나는 현대의 우화가 갖춰야할 제1조건을 만족시킨 셈이다.

우리는 더 이상 완전하고도 심오한 이해가 가능한 세계를 믿지 않는다. 이런 세상에서 보편적 진실은 단순하면서도 명징하게, 가벼운 농담처럼 던져져야 한다 (그래서 이것 역시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자조를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오징어게임이 세계인들을 열광시킨 이유다. 국경을 뛰어넘어 우리 모두는 ‘경험을 박탈당한 자,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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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터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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