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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추꽃 Dec 31. 2021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읽고

우선 이 책은 진입장벽이 조금 있는 책이라고 밝혀야 할 듯하다. 단순히 책의 두께뿐만 아니라(물론 이것도 압도적이지만) 경제학 배경지식이 없으면 쉽게 읽히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읽으면 읽을수록 존 메이너드 케인스라는 '사람'을 알게 되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읽었던 위인전기들에 등장하는 위인들은 결함 없는 다른 세상 사람 느낌이었는데 이 책은 케인스의 성격적 결함, 부족한 면,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인간적인 면, 독특한 성적 취향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위인전기를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책의 배경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1, 2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이며, 그리고 등장인물들도 그 유명한 버지니아 울프와 같은 블룸즈베리 멤버들, 미국 대통령들을 포함한 각국의 정상들이 너무나도 인간적으로 등장하여 사실 지루할 새가 없다. 하지만 우선은 케인스에 집중해보자. 아래에는 그에 대해 가장 인상 깊었던 점들을 나열해 보았다.


1.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났던 케인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경제학이 얼마나 인간적인 학문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학교 다닐 적엔 계산문제들과 그래프들에 짓눌러 이게 정말 문과 과목이 맞나 싶을 정도였는데, 그 기저에 있는 메커니즘은 철저한 인간의 반응에 대한 분석이다. 그래서 위대한 케인스가 경제학뿐 아니라 예술, 철학 등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가 조언을 하거나 그가 내리는 결정들도 인간에 대한 분석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들이 많다.


"우리가 중부 유럽에 빈곤에 빠지도록 의도적으로 노린다면 단언컨대 복수심은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어떤 것도 반동의 힘과 자포자기식 혁명 사이에서 마침내 폭발할 내전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독일이 일으킨 지난 전쟁의 공포가 사라지기도 전에 또 내전이 발생한다면 그 승리자가 누구든 문명과 우리 세대의 발전을 모조리 파괴할 것이다." (159 페이지)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과도한 배상금 문제에 대해 케인스가 내비친 의견이다. 당시 각국 정상들은 각자 자기 국가의 실익을 대변하는 데에 몰두해 있었지만 케인스만은 달랐다. 그리고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되어 독일 국민들의 분노 속에 히틀러가 탄생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1929년 주식붕괴 전에도 그는 다시금 통찰력을 보여준다. 이번에 그는 '불안감'이라는 인간의 심리에 집중한다.


"문제는 은행과 예금자들의 불안감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인데,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는 완전히 가늠하지 못했지만 그 불안감이 현재 상황에서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318 페이지)


어쩌면 그가 훌륭한 경제학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만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인간 행동 뒤의 욕구와 감정을 꿰뚫어 보고자 했기에 타당성 있는 이론을 고안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2. 조금 특별한 마이웨이를 갈 줄 알았던 케인스


케인스가 대단하게 느껴졌던 또 하나의 이유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이다. 우리가 보통 좌파 아니면 우파, 믿는 자 또는 불신자, 흑 또는 백, 모 아니면 도에서 선택하는 이유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도 쉽게 그 중간을 생각해내고 개척해 나가는 것이 어렵기도 하고, 창의적이고 유효한 대안을 내놓는 것 자체가 굉장히 튀는 일이고, 골치 아픈 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케인스는 그 어려운 걸 해내며 자신만의 생각과 이론을 만들 수 있었다.


나는 케인스가 그 과정에서 급진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케인스가 제안하는 정책들은 그 당시에는 낯설어서 급진적이라고 느껴졌을지도 몰라도 그는 늘 이것저것들 사이에서 그가 맞다고 생각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취사선택하며 새로운 문제 해결 방식을 택해온 중도주의자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극단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문제 해결에 집중했다. 독일 배상금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안할 때도 그는 독일과 승전국, 심지어 미국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유효한 방법을 고안해내기 위해 애썼다. 인간관계 속에서도 그는 정부를 위해 일하면서도 정부에 반감을 안고 있는 친구들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끝까지 포용하는 모습까지 보이기도 했다.


정부 주도의 적자사업을 통한 경제부양을 제안했을 때도 그는 이를 '사회주의'라고 딱지 붙이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자들이 그를 많이 따랐지만 말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였을까? 케인스는 스스로에게 던진 이 질문을 이내 접어두었다. '이 문제의 관건은 민간 기업과 공공 기업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선택은 이미 끝났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여러 방향에서 이는 정부가 이 일에 손을 대느냐 전혀 손을 대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페이지 267)


또 예를 들자면 그는 자유당이면서도 노동당의 장점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를 자유당에 접목시키고자 했다.


"심지어 케인스는 어렸을 때부터 그의 정치적 정체성의 토대가 된 정파적 충성심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지혜를 창조해야 할 때다. 현재의 우리를 만든 것들에 문제를 일으키고, 위험하고, 불복종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이는 자유당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 하지만 노동당에는 '이기적이지 않고 열정적인 정신'이 있었다. [...] 그는 노동당이 추구하는 윤리적 목표를 향해 자유주의를 더 공격적이고 더 효과적인 정당으로 재편하고 싶어 했다. [...] '자유당이 노동당에 비해 덜 진보적이어서는 안 되고, 새로운 생각에 덜 개방적이어서도 안 되며,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데 뒤처져서는 안 된다.'" (페이지 251)


누구보다 유연한 사고가 가능했기에 그는 금본위제 폐지, 적자 정책, 화폐 정책 등의 당시에는 급진적이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당연한 정책들을 제안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그의 경제이론 탄생에도 기여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버크의 실용적이고, 위험 회피적이며, 반혁명적인 보수주의를 루소의 급진적 민주주의의 이상과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을까? 요컨대 그는 프랑스혁명 이후로 철학자들이 극단적으로 다르게 이해했던 두 가지 정치 이론의 전통을 통일시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는 1920년대 중반에는 케인스의 능력을 뛰어넘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는 자유방임주의가 버크의 보수주의와 루소의 평등주의를 결합할 수 없는 경제 이론이라는 것을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케인스는 이를 가능케 하는 경제 이론을 연구하는 데 남은 생을 바치게 된다." (페이지 242)


3. 전략가 케인스


케인스가 오늘날 너무나도 인정받기 때문에 당연히 그가 활동하던 당시에도 모두가 그의 목소리에 귀기울였을것이라고 넘겨짚을만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엄청난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과 예측들은 권력자들에게 여러 번 무시당했다(물론 그들이 필요할 땐 다시 또 그에게 자문을 구하긴 했다). 그도 이를 인지했는데, 정말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가 그 상황이나 그들을 탓하지 않고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 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자신의 방식을 바꾸고 전략을 새롭게 짰다는 것이다. 상황 파악과 자기 성찰 능력이 두드러지는 전략가라고 느꼈다. 본인에게 익숙했던 방식만 고수했다면 지금의 케인스가 될 수 있었을까? 이 대목에서 그런 면이 자세히 나와있다.  


"케인스는 문필가로 상당한 독자층을 쌓았지만 그들이 지도자들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선거철에 무슨 공약을 하든 총리와 각료들은 일단 권력을 잡으면 주술을 쓰고, 신성화된 방정식을 숭배하며, 균형 예산과 고금리만이 진정한 구원의 길이라고 점치는 금융 신비주의자들에 의존했다. [...] 케인스가 더 많은 일반인을 설득하면 할수록, 금융권의 예언자들은 베일에 싸인 금융계의 진짜 비밀을 아는 것은 자신들 뿐이라고 정치인들을 구워삶았다. [...] 케인스가 권력에 다가가고 싶다면 먼저 그 신비주의자들을 개조해야 했다. 그래서 케인스는 스스로 신비주의자가 되기로 했다. [...] 금융이란 위대한 지식 논객들도 위대한 진리를 찾아 나가야 하는 어렵고 복잡한 영역이었다. 케인스는 대중 언론을 통해 적수들을 놀리고 조롱하는 방식을 중단하고, 학술지를 통해 더 전문적으로 주장을 펼치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잘못된 신화의 폭로자가 아닌, 낡은 사고방식을 뜯어고칠 거대하고 새로운 이론을 발전시키는 경제학 분야의 알버트 아인슈타인으로 자리매김하려는 것이었다. [...] 실제로 그들의 관점은 너무 공고해서 중대한 지적 변화가 있어야만 비로소 움직일 수 있었다. [...] 케인스에게는 경제학자만이 중요했다." (페이지 339).



케인스 정도는 아니더라도 위의 특징들은 세상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고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참고해볼 만한 특징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케인스처럼 천재일 필요는 없으니까. 당신도 케인스의 매력에 빠져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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