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카뮈 #책 #문학
어렸을 때 나는 모르는 낯선 골목들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되돌아 나오는 놀이를 종종 하곤 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평소 다녔던 길이 아닌 낯선 골목길로 들어서서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고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은 언제나 가슴 두근거리는 약간의 긴장과 두려움, 설렘을 느끼게 했다. 간혹 집으로 가는 길을 오래도록 찾지 못하거나 정말 길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들 때는 심장박동이 가슴이 터질 듯이 울리고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낯선 길목들 끝에 연결된 익숙한 길을 만나는 즐거움과 전혀 모르던 길을 알게 되는 재미가 있었기에 난 모험놀이라고 지칭하는 이 놀이를 지금까지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요즘처럼 시간에 쫓겨서 살게 된 지금은 이 놀이를 자주 할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 길눈이 밝은 나를 친구들은 인간 내비게이션이라고 할 정도로 한번 본 길은 눈에 잘 익히게 되었다.
알베르 카뮈를 만나게 되면서, 그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이 흡사 모험놀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넓게 펼쳐져 있는 광활한 독서의 밤하늘을 무수히 수놓은 빛나는 많은 별들 속에서 다음 독서의 방향을 잡게 되는 일은 가슴 설레는 우연의 선물이다. 블로그를 시작하고 민음사 명작을 시작으로 장 그르니에를 만나게 되고, 그의 제자 알베르 카뮈를 만나게 된 독서의 과정과 그 과정 속에서의 깨달음들은 내게 큰 행복감을 선사해주었다. 이 작가를 그동안 모르고 지냈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웠을 정도로 나는 그의 첫 소설 <이방인>에 푹 빠져버렸다.
소설가, 기자, 항만 선박회사 직원, 가정교사, 에세이스트, 철학자, 배우, 연출자, 편집자, 출판인 등은 알베르 카뮈가 일생동안 거쳐왔던 직업들이다. 그는 철학자로도 소설가로도 실존주의자나 공산주의자 등 모든 종류의 규정된 명칭으로 자신이 지칭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말과 글이 갖는 한계성을 끊임없이 자각해왔고, 실존에 다가가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론적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해왔던 모든 시도들은 바로 ‘인간’에 관한 것이었다. <이방인>은 살인을 저지른 한 남자가 인간이 만든 제도인 사법제도로 인해 어떤 식으로 사건의 본질을 왜곡당하고 사형에 이르는지를 우리 앞에 보여줌으로써, 인간사회의 부조리를 우리 앞에 드러내 보인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 인식의 출발점에는 바로 대상으로서의 ‘타인’이 있었다. ‘너’가 있음으로써 ‘나’가 있을 수 있었고, 인간은 바로 ‘너’라는 대상을 지칭할(규정지을) 언어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렇게 인간은 모든 사물과 대상에 고유한 명칭을 부여했고, 그 명칭을 체계로 사회제도를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은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현재 사회가 가진 제도와 규범, 통념, 도덕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게 된다. 인간은 그 자체로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화의 과정을 거쳐 사회 구성원으로 생활하게 되는데, 그 사회화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고, 이에 부정을 드러내는 사람들은 사회는 ‘이방인’이라고 부른다.
{ ~그날 슬펐었냐고 그는 나에게 물었다. 이 질문은 나를 몹시 놀라게 했다.
~물론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었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거다.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다소간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다.
그러자 변호사는 내 말을 가로막았는데, 매우 흥분한 듯이 보였다.
그는, 그러한 말은 법정에서나 예심판사의 방에서는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나에게 시켰다. p93}
‘뫼르소’는 그런 의미에서 사회의 '이방인'이다. 그는 사회가 강요하는 가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가 인식하고 자각할 수 있는 것들은 자신이 실제로 겪고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일들일뿐이다. 사회통념상 슬퍼해야 한다거나, 살인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자신에게 죄인의 역할을 강요하며 죄를 고백하고 사죄하기를 원하는 예비검사나 부속 사제의 말에 그는 동의할 수 없다. 그는 다만 자신이 살인죄를 저질렀다는 사실만 자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에게 붙여진 사회적 인식표 대로의 행동이 아닌 그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에 의해서 행동하고자 한다. 사회는 이러한 ‘이방인’들을 용납하지 못한다. 왼손잡이를 죄악시하며 억지로 오른손잡이로 바꿔놓으려 했던 예전의 관습들처럼, ‘이방인’은 사회의 위험요인이자 없애야 할 ‘악’인 것이다. 카뮈는 감정을 과장해서 표현하는 것 또한 거짓말이라고 뫼르소를 통해 전한다. <이방인>의 텍스트는 전후관계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 개별 텍스트 들은 제각각 분리된 채 그 각각의 사실만을 전달한다. <이방인>에서 사형을 앞두고 부속 사제를 향해 반항하는 ‘뫼르소’의 말들은 카뮈가 부조리한 우리 사회에 던지는 화두이다.
{ ~너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다. 그렇지 않고 뭐냐?
그러나 너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한 가치도 없어.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온 것만 같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생애 전체에 걸쳐,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쳐서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네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너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숙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들도 또한 장차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너 역시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네가 살인범으로 고발되었으면서 어머니의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받게 된들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인가? } p157~158
PS: 기술과 문명이 진보할수록 인간은 더 소외되고 고립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미 여러 가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소외의 문제는 이미 알베르 카뮈가 지적한 바 있는 '부조리'의 문제와 맞닿아있다. 갈수록 세분화되고 다양화되어가는 문명사회의 다양성에 비해 인간의 다양성은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문명이 진보할수록 인간과의 격차는 더욱 벌어져 문명과 인간의 괴리현상이 야기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격차 해소를 위해서는 다양화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다양한 욕구와 그 개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해줘야 하는데, 현재의 사회는 '카뮈'가 부정한 바 있는 사회적 식별표로 인간을 분류한다는 점이다. 그 일례로 공무원의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금지하여 파면 해임시킨, 이명박 정부의 예를 들 수 있겠다.
이미 교육을 통해 엄격한 자기 검열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은 채, 자신도 모르는 사이 판옵티콘과도 같은 감시 속에서 살아간다. 자신의 행동이 어느 날 동영상으로 인터넷에 공개되어 법원의 배심원제도와 같이 온라인 공간에서 한 사람이 매장당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보니, 갈수록 인간들이 창의력과 상상력 다양성을 상실한 채 회색 인간으로 박제화되는 인간소외와 사물화의 문제가 더욱 심화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발표 당시 이 작품의 장르를 소설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바로 이 작품이 갖고 있는 높은 사실성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겠다. 다큐멘터리나 기사 등의 사실이 전달해내지 못하는 문명의 부조리를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의 뫼르소를 통해 우리 앞에 보여줌으로써 그가 앞으로 작품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큰 그림을 항한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