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동안 뭘 배운 걸까?
보통 영어권 국가에서 몇 년 살면 영어가 확 늘 거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살아보니 생각보다 그렇지 않음을 몸소 체감하고 있다. 영국에서 산 지 3년 차가 되었고 일상생활에서 한국어를 입 밖으로 낼 일이 없을 정도로 인풋, 아웃풋 영어 99%의 삶을 살고 있음에도 영어에 현타 오는 순간들이 꽤나 자주 찾아온다. 아이러니하게도 고급스럽고 어려운 단어들을 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영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단어들이나 표현을 이 정도로 모르고 있었나 싶어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하루는 욕실 수도꼭지를 꽉 잠그지 않은 채로 그냥 자서 그걸 아침에 발견한 적이 있었는데 같이 살던 플랏 메이트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려는 순간, '수도꼭지를 그냥 틀어뒀다'는 것을 어떻게 영어로 얘기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전을 찾아보니 정말 간단했다.
"I left the tap running last night"
이렇게 막상 알게 되면 아~~ 하게 되는데 먼저 쓰려고 하면 생각나지 않는 표현들. 이런 상황들이 영국에 살면서 가장 현타가 오게 만드는 순간들이다. 나 영어 그래도 꽤 하는 줄 알았는데, 한참 멀었구나 겸손하게 만드는 순간들.
고급 영단어 외우기의 함정
학창 시절 때 영어 단어책을 하나 사서 그 책을 통째로 외웠던 기억이 난다. 단어 3000개 정도 되는 책이었는데 수능, 토플, 텝스 등 모든 영어 시험에 필수로 나오는 단어 총망라 시리즈였다. 그 많은 단어에 예문까지 다 익혔으니 영자 신문이나 영어로 된 책을 "읽을 땐" 모르는 단어가 거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영어를 잘한다는 착각에 빠져 살았다. 그 후로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영국에 진짜 살러 와서야 나의 영어 실력의 구멍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어려운 글은 척척 읽으면서 그것보다 훨씬 쉬운 표현을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게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Ramification(결과, 영향)이나 Heinous(극악무도한)은 알면서 leave the tap running을 모를 수가 있나? 부끄럽지만 그동안의 잘못된 영어 공부 방법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다른 해결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짜 말하고 싶은 영어
영국에서 일상을 살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입이 떨어지지 않는 상황이 정말 많이 찾아왔다. 남자친구한테 당근을 채 썰어 달라고 (Can you cut the carrot into thin strips) 할 때, 하루 이틀 정도 시간을 갖고 신중하게 고민해 본다고 (I'll sleep on it) 할 때, 친구에게 이 비밀을 털어놓을 사람이 너밖에 없다고 얘기할 때 (You are the only person that I can confide in), 휴양지로 여행을 간 친구에게 네 인스타그램 사진으로 대리만족 한다고 할 때 (I'm living vicariously through your holiday pics)등 일상생활에서 정말 자주 쓰는 말들이지만 막상 영어로 얘기하려고 하면 어딘가 모르게 막히는 순간들 말이다. 물론, sleep on it이라는 표현 대신 think about it (한 번 생각해 볼게)이라고 하거나 vicariously 대신 그냥 I'm so jealous (네가 부러워)라고 해도 의미는 통하지만, 영어를 포함한 모든 언어에는 그 표현만이 주는 찰떡같은 뉘앙스가 있기 때문에 좀 더 풍부한 묘사를 위해서라도 상황에 딱 맞는 표현을 배우려 노력하는 편이다.
영어를 잘하는 방법으로 쉐도잉, 영자 신문 읽기 등등 정말 다양한 방법들이 존재하지만, 나에게 가장 효과가 좋았던 방법은 그냥 내가 한국어를 하듯이 영어를 써보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고급 영단어는 때려치우고 내가 진짜 영어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날 말을 하다가 막힌 것은 바로 사전을 찾아보거나 비슷한 영어 표현을 찾아봤다. 요즘은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 콘텐츠가 정말 잘 되어 있어서 배우기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배운 다음날에는 무조건 어떻게든 그 표현을 실제로 써봤다. 그리고 동료나 친구들이 실제로 쓰는 말 중에 저건 나중에 나도 써먹어 보고 싶다 하는 표현들은 그 자리에서 메모장에 옮겨 적었다. 그랬더니 굳이 영어 단어를 무식하게 외우지 않아도 자연스레 체화가 되기 시작했다.
비즈니스 영어는 관용어구 천국
비즈니스 영어는 일상생활 영어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아무래도 좀 더 격식을 차린 단어나 표현들을 많이 쓰긴 하는데 무엇보다 관용어구를 정말 x100 많이 쓴다. 회사에서 정말 자주 쓰는 표현들 중에 지금 당장 생각나는 문장들을 몇 개 써보면...
1.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습니다
- Everything's up in the air.
2.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 We need to get all ducks in a row.
3. 우리 팀 기량을 좀 더 높여야 돼
- We really need to up our game.
4. 그건 제 능력 밖이에요
- This is way beyond my wheelhouse. 혹은 It's out of my expertise.
5. 자, 다들 얼른 시작해 봅시다!
- Let's get the ball rolling!
회사에서는 위의 예시들처럼, 막상 영어로 직역을 하면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는 표현들을 매일 접한다. (물론 저 문장들은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쓰인다.) 이건 정말 그 상황에서 뉘앙스를 잘 알고 써야 하기 때문에,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배우거나 써먹을 기회가 사실 잘 없다. 처음 입사했을 때의 그 멘붕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분명히 저 사람들은 영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으니까. 학창 시절 죽어라 외웠던 3000개의 고급 영단어가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영국에서 2년 넘게 살면서 그 단어들을 한 번이라도 써본 적이 있었던가? 특히 영국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그동안 대체 무슨 영어를 배운 걸까 라는 현타를 거의 매일 느꼈던 것 같다.
영어는 존버다
성적을 내는 시험 영어는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실제 생활에서 쓰는 영어는 길게 봐야 하는 장기전이라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매일 영어로 일하고, 이메일을 쓰고, 미팅하고,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영국인 남자친구와 같이 살면서 하루 종일 영어로 이야기하는데도 가끔은 왜 내 영어는 아직도 제자리일까 하는 순간이 문득문득 찾아온다. 그러다 한국어 마저 내 마음대로 나오지 않을 때, 아,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Bye-lingual인가 싶다. 물론 2년 전 처음 영국에 왔을 때와 비교해 보면 분명히 많이 발전했다. 처음엔 영국에서 회사 생활을 해야한다는 그 자체가 마냥 두려웠는데 지금은 그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영어로 의견을 나누고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해내고 있지 않은가. 정말 지독히도 천천히, 그렇지만 꾸준히(Slowly, but surely) 좋아지고 있다. 다만 너무 속도가 느려서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성격도 급한 데다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당장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그나마 있던 추진력도 사라져 버리지만, '영어는 존버다'라는 생각으로 지금도 나는 매일 영어와 싸우고 있다. 영어의 지향점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는 내가 한국어를 사용하는 만큼의 풍부한 표현력과 문장의 깊이, 그리고 말로 사람들을 웃길 수 있는 위트를 가지는 것이 목표다. 언어의 한계로 아직 드러나지 못한 나의 매력을 언젠가는 여기서도 100%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한 80% 정도인 것 같다. 나처럼 해외에서 제2 혹은 3의 외국어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같이 존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