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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seul Jan 19. 2024

유리조각을 끝까지 쥐고 있는 이유

 난 가서 한국인 안 만날 거야. 해외까지 가서 무슨. 호기롭게 뱉었던 말이 나를 호되게 내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외로울 틈이 없었다. 출국하기 전부터 괴롭히던 행정 문제들은 끈질기게 나를 붙들고 늘어졌고 느리고 복잡한 행정 처리로 유명한 프랑스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대중교통 타는 것만 해도 찾아보고 해야 할 일이 잔뜩 있었고, 한국과는 다른 식당/카페 예절 등 프랑스만의 시스템과 문화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캄캄하고 깊은 터널에 밝은 전구를 하나씩 끼워가듯, 차근차근 해결해 나갔다. 그런 식으로 막막함에서 오는 초조함을 달랬다. 새롭고 낯선 것에서 오는 무지에 대한 감각은 두려움을 품고 있긴 해도 찾아보면 전부 명쾌한 해답이 있었고 결국에는 하면 되는 것들이었다.

 

 주변을 점점 익숙한 색들로 칠해가며 안정감을 되찾았다. 생각한 것보다 적응이 빨랐다. 두 번째로 나를 찾아온 건 앎에서 오는 그리움들이었다. 가장 가벼운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음식. 프랑스 메뉴판에 적혀있는 매콤함은 달콤함이었다. 매콤한 말로 나를 속여 달달함을 내어 놓는 게 츤데레 같았다. 다행히 파리는 한식당이 많았다. 비싸긴 했지만. 한인마트에서도 맥주, 조미료, 떡볶이, 고기 등등 다양하게 구할 수 있다. 이 그리움을 채워가며 얻는 쾌락도 길게 가지는 못했다. 비싼 외식비 때문에 자연스레 한인마트에서 사 온 식재료들로 계속해서 먹다 보니 그래프는 금세 완만해졌다.

 

 다음으로는 겨우 적응한 프랑스 생활과 시스템에 대한 불만족이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그렸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맞춰주려고 정신없이 노력하다가도 익숙해지니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하는 게 꼭 연인 사이 같이 느껴져 웃음이 났다. 소문이 자자하던 프랑스 매트로에 대한 안 좋은 인식에 비해서는 훨씬 괜찮았지만, 한국 지하철에 비하면 훨씬 별로였다. 청결하지 못함은 기본이고, 틈만 나면 열차가 멈추고, 불이 꺼지고, 갑자기 내려 반대편 매트로로 옮겨 타야 했다. 끊임없이 칭얼대는 아기를 정처 없이 달래주는 마음으로 참아냈다. 버스는 또 어떤가. 도착 시간은 장식에 불과했고, 정해 놓은 목적지 끝까지 가는 꼴을 못 봤다. 갑자기 중간에 내리라고 닦달한다. 술을 진탕 마시고 새벽 버스에 올라 눈을 떠보면 세상모르는 곳에 내려야 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집이었다. 비싼 월세를 내고 넓은 집에서 살았기에 불편하다고 징징대기에는 과분했다. 하지만 불편한 걸 어찌하리.. 분명 밖에서 집 안으로 들어왔는데 집이 아닌 기분이 든다. 바닥의 색깔과 질감이 맨 발로 다니고 싶은 마음을 싹 사라지게 만드는 탓에 슬리퍼를 신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집인데도 불구하고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특히 겨울에는 난방이 되지 않아 바닥이 차갑게 식어 있다는 점도 이에 한몫했다. 화장실이 가장 골칫덩어리였다. 유럽의 화장실은 건식이라 물이 빠지는 곳이 없다. 즉, 청소를 하기에 굉장히 불편한 환경이다. 시원하게 화장실에 물을 뿌리고 솔을 가지고 박박 문대며 청소를 하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달았다. 또 샤워부스는 콩알만 한데, 부스 형태의 유리로 막혀있는 게 아니었어서 샤워 커튼을 설치하고 안으로 집어넣어 샤워해야 했다. 옴짝달싹 못하며 물이 밖으로 튀지 않게 조심조심 씻어야 하는 점이 안 그래도 귀찮은 일을 더 버겁게 만들었다.

 


 대망의 마지막 그리움은 사람이다. 한국인과 한국어로 대화하는 것. 일대일로 깊은 대화를 즐겨하는 나로서는 가장 견디기 힘들었고, 동시에 가장 해결하기 힘든 문제였다. 검색해서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시간당 9,000원, 대화친구 구합니다’라며 돈을 들여 사람을 사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처음에 굳게 다짐했던 것과 달리, 한국인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며 변명해보고자 한다. 나름 명확하게 결심했던 목표 중 하나를 바꾸기 위해선 나를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납득시키고 설득하기 위한 정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막상 가보니까 한국인이 그리워지더라고. 라며 어물쩍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그냥 그래도 되는데 말이다.

 

 캠퍼스 안에 있는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했다. 어미새가 먹이를 가져다주기만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파견교에서 기숙사 정보를 주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내가 먼저 요청 메일을 보냈고, 추후 모든 학생들에게 일괄적으로 하우싱과 관련한 메일을 전달한다고 안내해 주었다. 시간이 흐르고, 파견교에 대한 믿음에 실금이 갔을 때쯤 재차 확인 메일을 보냈고, 그걸 기점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집과 관련한 pdf파일을 입에 문 채 날아왔다. ‘보낸 이’를 보니 학생들에게 동시 다발적으로 보낸 것 같긴 했으나 불안했다. 마치, 아 맞다! 까먹었네. 하며 급하게 보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대부분의 싸한 감각은 들어맞는다. 이번에도 비껴가지 않았다. 받은 파일 안에 있는 사이트들로 들어가 집을 찾아보니 이미 방이 거의 다 차 있었고 남은 것들은 가격이 너무 비싸거나 2인실/3인실 형태였다. 죽어도 누군가와 같은 방에서 살고 싶지는 않았고, 그러기에는 가격이 너무 비쌌다. 결국 집을 따로 구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이미 아기새는 배가 고파 아사하기 직전이었다. 너무 늦었다. 몇 주 동안 필사적으로 둘러보고 여러 기숙사에 연락을 넣길 반복했으나 그 어느 곳에서도 긍정적인 답변을 받지 못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답장 자체가 오지 않는 게 대부분이었다.


 최후의 수단으로 프랑스 현지에 운영하는 유학센터를 통해 집을 구했다. 다른 곳에 비해 월세가 비싼 집이긴 했지만 남아있던 캠퍼스 기숙사 비용보다는 저렴했고, 무엇보다 집을 구했다는 것 자체로 엎드려 절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불 가릴 상황이 안 됐다. 수속비용도 다른 유학센터에 비해 굉장히 저렴했고 상담원 분도 친절하게 응대해 주셔서 마음이 갔다. 집을 구한 건 다행이었지만 이것이 이후 외로움의 화근이 됐다. '교환학생'이라는 단어를 짝꿍처럼 따라다니는 것 중 하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던 하이틴 같은 대학 생활이다. 많은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고 놀며 복작복작하게 지내는 걸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파리에서 파리 한 마리 날리지 않는 집에서 홀로 보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초기에는 학생회에서 주최하는 이런저런 파티에 꼬박꼬박 참여했다. 다녀오고 나면 누가 누군지 모를 인스타 아이디들이 잔뜩 불어나곤 했다. 점점 학교 친구들이 눈에 익고 오티가 끝나고 같이 밥을 먹기도 했다. 다만 본격적으로 학기가 시작되니 연락할 명분이 없어져 따로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먼저 보자고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국에서 지낼 때도 먼저 연락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만난다고 해도 영어를 잘 못하니 제대로 놀지 못하는 건 둘째치고 상대가 나의 영어 실력으로 답답해하는 걸 보기가 싫었다. 또한 연락해서 밥을 먹자고 할 정도로 친한가?를 생각해 봤을 때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학기 초반에 학생회가 여는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이후로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내가 지내는 기숙사마저 교류할 공간이 없었다. 개인 주방에 개인 화장실을 이용했다. 공용 주방이 따로 있긴 했지만 관리가 잘 되지 않는 것을 이유로 운영하고 있지 않았다.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도 학생보다는 인턴십이나 직장인이 많으셨던 것 같고 나와 같은 교환학생의 처지인 사람들이 없었던 것 같다. 추측성 어미로 마무리하는 이유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으니 그들이 어떤 목적으로 여기에 살고 있는지 애초에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친해진 멕시코 친구가 있긴 했지만 꽤나 자주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영어를 핑계로 용기가 없어 외로워했던 것을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변명하고 있다며 탓하면 나도 할 말이 없다. 그게 사실이니까 반박할 이유도 없다. 실제로 영어로 이야기하는 게 나도 상대도 답답해했고, 내가 좋아하는 깊고 진지한 대화를 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그렇게 자연스레 한국어가, 한국인이 고달프기 시작했다. 커뮤니티를 통해 내가 살고 있는 동네를 중심으로 만날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내 기숙사가 파리 외곽에 위치하고 있어서 찾기가 수월하지만은 않았으나 그래도 5~6명 정도 연락이 닿아 만났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 족족 한 번 만나고 헤어지기에 그쳤다. 만나는 동안, 정적이 흘렀던 것도,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분명 하하 호호 즐겁게 놀았는데 연락이 안 되기 일쑤였다. 3명 정도 만나고 나니, 그 뒤로는 나도 기대를 접고 일회성 만남임을 각오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 각오가 씁쓸해 보이긴 해도 마음만은 편했다. 그렇게 꽤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외로움을 사그라들게 하려던 노력이었는데 오히려 만남이 늘어날 때마다 외로움도 함께 늘어났다. 일회성 만남으로 끝났을 때, 그 순간에 오는 외로움이 비대했다. 외로움이 외로움을 낳길 반복했다. 짧지만 강력하고 마약 같은 경험이었다.


 결국 가장 소중한 건 걸러지고 걸러져 마지막에 남는다. 나한텐 그게 사람이고 대화였던 것 같다. 마지막에 남은 건 더 이상 걸러질 수가 없는 탓에 뭐가 어떻든 내가 끝까지 안고 가야 할 것 들이다. 그런 것들은 가장 큰 행복을 안겨주기도 함과 동시에 우리를 무척이나 힘들게 한다. 그 힘듦에는 뚜렷한 답이 있지도 않고, 다른 무언가로 대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소중한 것들에 있어서 갈등과 고난이 있어야 자꾸 고뇌하고 발전할 수 있으니까. 소중하다는 걸 계속해서 상기시킬 수 있으니까. 가족끼리도, 연인끼리도, 친구끼리도, 화를 내며 싸운다. 서로 사랑하니까, 소중하니까 싸운다. 그렇게 우리는 울면서도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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