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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M May 15. 2019

아무도 죽지 않는 날,  아무도 특별하게 죽지 않는 날

#01, 2019, KM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간들을 생각해본다. 더 많은 돈, 더 많은 지식, 더 많은 친구, 더 많은 인기, 더 많은 건강, 더 많은 존경을. 그것들을 위한 땔감으로 바쳐진 수많은 시간들. 그리고 그것들과 동시에 외면당해 뒷면으로 사라져 간 인연과 시간들. 한 줌 재로 불귀의 것이 된 나의 과거들에게 그저 묵념을 표한다.




바람 부는 들판 위에 키질하는 여인을 본 기억이 있다. 여인이 키를 들고 흔들면 쭉정이들이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는 초연한 모습을. 잊히지 않는 얼굴들이 내게 남긴 상처들은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 미워하고 원망하던 마음 없이 좋은 얼굴만 남았다. 기억의 들판에서 키질을 하고도 잊히지 않는 그 얼굴들을 다시금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까무룩 해지면, 나는 이렇게 되뇌인다. 내가 아직께 사랑하는 것은 나를 버리고 나를 떠난 얼굴들이 아니라, 그들이 주고 간 아름다운 시간들만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몸부림친들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무언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아주 달콤한 착각인 것이었노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더 이상 '되기'가 나의 게으름과 태만을 꾸짖지 않는다. 이처럼 한갓진 마음은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한다. 차별과 부조리 앞에 눈감기가 아니라 손을 내밀 여유와 의지를 갖게 됐다.




아무도 없는 거리와 도로를 가로지르는 바람을 처량하다 느끼게 됐다. 어떤 이의 말처럼 가장 특별한 날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 내가 바라기는 아무도 죽지 않는 날. 아무도 억울하게 죽지 않는 날. 기념일과 크리스마스와 새 해의 특별함이 아니라, 도로 위 교통사고 전광판의 '사망 0'을 보는 것. 뉴스에서 누군가의 억울한 죽음을 보도하지 않는 것. 언젠가부터 한 겹 한 겹 벗겨진 피부가 어떠한 죽음 앞에, 나 스스로를 더 민감하고 아프게 반응케 했다. 이제와 뒤돌아 보면 우리는 강한 가죽을 입고 있어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너무도 둔감했다. 그러나 시나브로 누군가의 추위가 나에게 추위로 다가오고, 누군가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다가오고, 누군가의 슬픔과 억울함과 노여움과 처량함이 나의 그것들로 다가오게 되었다. 마침내는 누군가의 죽음도 나의 죽음처럼 다가올까. 오늘이 특별하기를 기도한다. 부디 오늘만은 특별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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