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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M Dec 19. 2023

다시 뜨겁게



오늘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이 한 칸씩 띄엄띄엄 앉아서 와이프와 함께 앉을 수 없어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와이프 옆자리에 앉은 한 남자가 보였다. 이십 대 초반쯤 됐을까, 검은색 티셔츠, 검은색 바지, 검은색 패딩, 검은색 백팩음 입고 있었다. 머리는 조금 어두운 붉은색으로 염색을 했는데 꽤나 시간이 지난 탓에 검은 머리가 더 많아 보였다. 귀를 뚫어서 별다른 장식이 들어가지 않은 은색 링형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코를 훌쩍였다. 와이프도 감기로 고생하는 탓에 감기 걸린 사람들끼리 나란히 앉았다고 생각했는데, 유심히 보니 울고 있었다. 패딩 속 티셔츠를 꺼내 눈물을 닦았다. 계속 고개를 숙인 채.


그는 꽤나 오래 우리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왔다. 우리가 내린 곳에서 황급히 따라 내려, 다시 반대쪽 열차를 타러 가는 것으로 보아 아마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쳐 온 듯하다. 잠들지는 않았으나 그렇게도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해야할 만큼 그의 생각은 깊었던 걸까?


무슨 연유로 울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지만. 


가만 생각하게 된 일은, 나는 누군가 앞에서 울어야 할 만큼 북받쳤던 적이 있나 하는 질문이다. 


나는 좀처럼 울지 않는 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긴 한데 나를 울게 하는 몇 가지 포인트가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억울할 때다. 어려서 부모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진위는 관심 없이 결과만 놓고 혼나야 하는 상황에서 그 답답함에 울곤 했다. 그 결핍은 여전해서, 연애와 결혼생활에서도 몇 년 주기로 한 번씩 사랑싸움 대신 울어버리기로 내 분노를 표출하고는 한다. 


이십 대 때는 종종 울고 싶을 때가 있었고, 울기도 했다. 지하철처럼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우는 일은 없었지만, 길을 걸어가면서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울어버린 적은 있다. 운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감정이라는 게 어떤 방 안에 있는 거라고 상상해 본다면, 실제로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 방 안에 어떤 특정할 수 없는 감정이 차고 차고 차서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을 때 그게 결국에는 터져버리는 것의 표출 같은 거다. 그 방의 크기가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를 뿐. 그런데 그 터져버리는 일은 실제로 어떤 카타르시스가 있다. 내 기억이 미화된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그렇게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않았던 때 느꼈던 감정은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의 최고조가 아니라, 일종의 기쁨이었다.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다.


이렇든 저렇든 간에 내가 생각한 것은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냐는 거다.  기억나지 않는다. 왜 그렇게 됐을까? 아마도 그렇게 간절한 것이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감정을 소비하고, 몸과 마음을 다해서 얻고 싶은 무언가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사회적 위치나, 나의 상태, 누군가의 인정, 돈이나 명예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누군가의 마음일 수도. 그마저도 나는 간절하지 않은 사람이 된 거다. 


다른 의미에서는 대단히 안정적인 상태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십 대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여유로움이다. 뉘일 집이 있고, 집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차가 있고, 차를 관리한 여력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강아지가 있고, 부유하지는 않지만 하고 싶은 걸 하고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다. 딱히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장교로 복무하는 것은 나를 이런 상태로 방치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것이 군대고, 장교여서가 아니라 어떤 월급을 받는 직장인의 상태면 아마 똑같았을 거다. 월급은 일종의 마약이다. 내 하루의 시간을 거기에 쓰면 돈을 받고, 그 돈으로 생활을 하고 그 생활의 여유와 풍족에 잠시 취해 다시 일터로 돌아간다. 자신이 원하는 직업에 종사하거나, 자아를 실현하는 직업을 선택했을 때는 얘기가 다를 거 같다. 나는 그런 직업을 갖지 못해서 함부로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내 상황만 놓고 봤을 때 나에게 월급과 일과 삶의 관계는 그렇다.


나는 울고 싶다. 레슨비와 반주비로 돈을 다 써버려서 버스를 탈 돈이 없어서, 으슥 으슥 추워지는 가을에 우산을 쓰고 아무도 없는 그 길을 걸어서 학교로 가던, 어차피 출석은 물 건너갔으나 다시 돌아갈 돈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계속 걸어야 했던 그날의 내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흘렸던 눈물이 그립다.


어떤 일에 뜨겁고 싶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어떤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는 걸 느끼고 싶다.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당장이라도 그걸 할 수 있었던 그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다. 그 일이라면 지치지 않던, 완전히 녹초가 되어도 즐거울 만큼 내가 빠져들어서 몰입할 수 있는 일을 다시 마주하고 싶다.


그래서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군중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게이치 않고 완전히 터져 나오는 눈물을 흘리는 나 자신을 다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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