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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네 Sep 18. 2023

<작은마음동호회>를 읽고

나의 ‘작고 작은’ 마음


‘작은마음동호회’라니. 제목부터가 너무 예쁜 게 아닌가. 50대 언니들과 하는 책 모임에서 가벼운 느낌으로 읽고 싶어 선정했다. 카페에 모인 언니들은 먼저 나에게 어떻게 읽었는지 물었는데 내 대답 안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 귀 기울이는 듯 보였다.


실은 나도 다소 당황했다. 정여울 작가의 추천과 SNS 피드에서도 본 적이 있고 리뷰도 평점이 높았으나 ‘작은 마음’ 같은 보드라운 얘기들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은 사회 약자에 대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고 대부분은 퀴어(성소수자 전체를 뜻함)에 관한 내용이다. 나는 이야기들이 전체적으로 좋았고, 내가 몰랐던 퀴어들의 아픔이나 사소한 부분도 알게 되어 마음 아파하며 읽었다. 다만 걱정된 건 내 ‘덕분’에 이 책을 읽은 언니들인데 그것도 몇 작품이 아니라 대다수가 퀴어에 관한 이야기라 그게 염려되었다.


가까운 가족 중에서도 마블 등의 영화에서 성소수자가 근래에 많이 등장하는 추세에 대해 불편함을 표현한 이도 있었다. 아이들에게도 무조건 분별없이 해당 컨텐츠들을 보여주는 것에 대해서도 유의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나는 성소수자도 사회적 약자라는 점을 고려할 때 컨텐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도 나쁘지 않으며, 아이들에게 노출되는 것도 ‘사실 그 자체’라는 관점에서 굳이 가려가며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왔다.

 

이 책의 대부분이 퀴어에 관한 내용이라는 사실에 불편감을 느꼈다는 언니는 나의 가족원과 비슷한 의견이라 했는데, 그녀의 말로 그들이 느끼는 지점을 알게 됐다. 보통 그들은 (실은 내 주변의 많은 사람이) 퀴어들을 인정하나 무언가 과하다고 말하곤 했다. 예를 들어 퀴어 축제만 해도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과한 의상이라거나, 굳이 영화 시리즈에서 전면에 내세워서 디테일을 알게 된다든지 하는 일은 불편하다는 거다. 그 말에서 어떤 분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지하철에 앉은 맞은 편 여성이 기초부터 메이크업까지 풀세팅을 하는 모습을 원치 않지만 그대로 보게 되어 불쾌했다고. 아주 사적인 부분을 강제적으로 보게 되었다는 건데, 왠지 퀴어에 관한 그들의 불편감도 그런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50대 언니는 이런 비유를 했다. 어떤 물건을 파는 사람이 그 물건을 팔고 홍보하는 건 좋지만, 지나가는 사람을 잡아끌어 강매당하는 기분이라고 했다. 인정은 하지만 굳이 알고 싶지 않은데 강압적으로 알아야 한다며 노출되는 듯하다고 말했다. 요즘은 소수자에 대한 컨텐츠들이 특히나 많아져 이런 내용들에 대해 (인정을 넘어) 지지하지 않으면 몰상식하다는 듯 몰리는 점도 마뜩잖다며.   


과연 이해되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작년 방콕 여행에서 게이 클럽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공연도 있는 유명한 곳이었는데 주로 K-POP 걸그룹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한 구역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아주 신나게 연습한 안무를 선보이는, 겉으로는 남자로 보이는 무리가 있었다. 어찌나 신나고 행복해 보이는지 순수한 열정에 감동하였더랬다.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을까, 얼마나 이 시간이 행복할까, 평소 표출하지 못하는 자아로 얼마나 힘들어했을까. 문득 장애인과 더불어 가는 세상을 만들자는 공중파 캠패인뿐 아니라 성소수자와도 더불어 가는 세상을 만들자는 인식 개선 캠페인 광고는 왜 TV에서 볼 수 없는지 안타까웠다는 얘기를 공유했다.


또 다른 언니는 최근에 발목을 심하게 다쳐 뼈가 부스러졌다. 철심을 박아 불편한 다리를 끌고 나온 그녀는 이번 기회로 사회적 약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됐다고 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닐 때 길이나 엘리베이터에서 자신 때문에 피해를 주게 될까 봐 얼마나 움츠러드는지, 횡단보도를 건너는 신호 시간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가기에는 턱없이 짧아 외출을 꺼리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얼마나 많은 영역에서 우리가 사회적 약자들을 헤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지 다시금 깨닫게 됐다.


결이 살짝은 다르지만, 나의 ‘서울 미국 사람’이던 정체성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상경하여 서울서 20여 년을 보내다 지방으로 작년에 이주했는데 그땐 비슷한 연령의 또래 또는 관심사에 대해 내가 공유하고 나눌 사람들이 이곳엔 없을 줄 알았다. 특히 젊은 층은 웬만하면 서울로 가니 지방에서는 친구를 못 만들 줄 알았다. 언니들에게 처음 털어놓았는데 작년에 처음 책 모임을 하고서 집에 가서 신랑에게 했던 나의 말을 전했다. ‘아니, 이곳에서도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 그건 무시가 아니라 정말 무지에 가까웠는데 그때 나는 오래전에 미국에서 ‘너희 나라에도 전자레인지가 있지? 있나?’라고 물어본 친구 엄마가 문득 생각났다. 악의 없는 무지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잘못하면 상대가 상처 입을 수 있는, 악의가 전혀 없지만 둘러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수많은 일들.


‘서울 공화국’이라는 말도 서울을 벗어나고서야 뇌에 인지가 됐다. 비로소 내가 있던 곳에서 벗어나보거나 시선을 조금은 돌려야 아주 작게라도 알 수 있는 무수한 일들에 대해 마음을 쓰려는 노력을 계속하겠다는, 아직은 다짐에 불과한 그런 ‘작은 마음’을 더 키워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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