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태신 Jan 07. 2024

역주행

그믐을 향해 왼쪽 속살을 덜어내고 있는 달이 7일 일요일 새벽 7시 어두운 중천에 떠 있다. 전날 저녁 많은 눈이 내렸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맑은 새벽이다.    

  

사실 6일 밤 나는 눈을 보지 못했다. 눈이 오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관리 직원의 당부만 들었을 뿐이다. 하필 내가 일하는 물류센터 층은 창이 하나도 없는 초대형 직육면체 성냥갑이다. 10시 반쯤 식사를 하고서 건물 밖으로 나가보았지만 눈은 그쳤을 뿐만 아니라 바닥엔 강물에 눈이 내린 듯 눈의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었다. 작은 상심을 겪었다.


 오늘 글은 위 내용과 더불어 나름 독특한 신년 일터 경험을 담은 것이다. 이 글 제목부터 이미 심상치 않은가.         

***     


“역주행 안 돼요. 내리세요.”


몇 달 전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의아해했다. 장소는 물류센터 건물의 지하 1층 엘리베이터 앞.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긴 줄 맨 앞에 탑승 대기하고 있던 사원이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사원에게 큰소리로 해댄 말이다.      


내가 야간에 일하는 물류센터의 식사 시작 시간은 밤 10시에서 11시 사이. 수백 명의 사원들이 한꺼번에 식당에 몰리지 않도록 부서별로 약간씩의 순차를 두고 있긴 하지만 이 시간대 엘리베이터는 연거푸 만원이기 일쑤다.      


기다리는 게 싫어 제일 낮은 지하 1층에서 식당이 있는 최고층 4층까지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려면 객기를 부려야 한다.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젊은이들처럼 나도 한때 그랬다가 이젠 체념하고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멍하니 줄을 서고 있다.      


한 개 층 천장 높이가 보통 건물의 3~4배 되기 때문에 지하에서 식당까지 수많은 계단참을 거쳐 돌고 돌아야 하는 계단 수는 엄청나다. 걸으며 일하는 사원들이 상당수이기에 식사시간의 계단 이동은 중노동에 가깝다. 계단을 이용하면 다이어트가 되고 심장에도 좋다는 말은 객쩍은 소리다.

     

특히 내가 일하는 최하층 지하 1층 엘리베이터 앞은 과장해 말하자면 구호물자 트럭을 둘러싼 피난민 형국이다. 그런데 간혹 1층에서 일하던 사원 두세 사람이 하행하는 엘리베이터에 미리 타고 지하 1층으로 내려오는 경우가 있다. 일종의 편법이자 새치기인 셈이다.      


우리 센터는 식사를 위한 이동구간이 길다. 그런데도 식사시간은 야박하게 한 시간에서 업무 준비시간 5분을 뺀 55분이다. 미리 공지된 식사 메뉴가 무엇이든 재빨리 식사를 하고서 핸드폰을 사용하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수다를 떨어야 하는 사원들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신경이 곤두서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하 1층을 목적지로 하행하는 경우가 아닌, ‘상행을 위한 하행’을 하는 사원들은 으레 위와 같은 호통을 듣기 일쑤다. 줄을 선 채로 처음 그 호통을 들었을 땐 심하다 싶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 이것도 일종의 ‘공공질서’이겠구나 여기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호통을 듣는 사원들은 대부분 멋모르고 요행을 부린 신입들이다. 참고로 나처럼 일용직 비중이 높은 물류센터는 노동 강도가 센 편이라 직원 정착률이 엄청 낮고 신입들이 뜨내기손님처럼 많다.      


영국 헌법처럼 명문화되지 않았지만 이런 사례가 어느 날부터인가 관습법이 돼버렸다. 며칠 전 엘리베이터 옆 벽면에 ‘역주행 금지’라고 ‘문패’를 달아놓은 것을 본 것이다. 오래 다녔지만 예전에는 없던 풍경이다. 만약 내가 엘리베이터 맨 앞쪽에 대기하고 있다면 나도 그런 호통을 칠 수 있을까. 그럴 자신이 없다. 이런 일에 쌍심지 켤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런데 ‘해도 괜찮은’ 역주행은 각본상 필요한 액션영화에서다. 스릴 넘치는 자동차 추격신이 자주 등장하고 그때 역주행은 단골 메뉴다. ‘역주행’의 ‘표준국어대사전’ 풀이는 “같은 찻길에서 다른 차량들이 달리는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달림”이다.      


예를 들어 영화 <본 아이덴티티>에서 조작으로 공개수배자가 돼버린 주인공 제이슨 본은 경찰의 추격을 피해 소형차로 파리 센 강 주변 도로를 역주행한다. 이런 액션영화에서 주인공이 따라 잡혀 붙잡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정보요원 출신인 경우가 많아 운전 실력이 뛰어난 턱에 무사히 빠져나간다.   

   

그렇지만 역주행 도중에 추격전을 펼치는 경찰이나, 주인공 차와 맞닥뜨린 일반 시민들은 봉변을 당할 수밖에 없다. 자동차가 다중 충돌하며 부서지고 보도 행인들은 혼비백산 상태가 된다. 그러나 주인공이 역주행으로 인한 사고로 죄책감을 느끼는 장면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다. 자기 생명을 지켜야 하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도중에 잡히면 영화는 김이 빠지고 ‘흥미로운’ 다음 전개를 펼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에 대해서도 ‘역주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금지 행동으로 정하고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적합한 단어이긴 한가 싶은 것이다.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신입들이 이런 상황에서 “역주행 안 돼요”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얌체 짓은 했어도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딱히 떠오르는 다른 단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해는 되지만 대부분의 일반 빌딩 엘리베이터에서 이런 사례를 본 적이 없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공중질서를 잘 지키는 편이다. 편법을 별로 안 좋아한다. 그런데 상행 버튼을 누른 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무심코 탔는데 그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으로 하행하는 중이었음을 나도 경험해 봤다. 솔직하게 의도적인 경우는 평생 두세 번 있었던 것 같다. 분명 만원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서 일터에서의 이런 관습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     



동짓날을 지나 낮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이번엔 초승달이 오른쪽 속살을 보태며 반달을 향하는 느낌이다. 낮이 길어진다는 것은 일몰 시각이 늦춰진다는 말과 맥을 같이 한다. 어제 출근 땐 날씨가 맑은 편이어서 이번 겨울 들어 처음 창밖으로 노을의 끝자락을 볼 수 있었다. 점점 그 끝자락이 길게 보일 것이고 그 노을 옷자락의 주인인 해를 보는 일이 가까워질 것이다. 더불어 나의 노을 감상도 빈번해질 터.     


자연 자체는 역주행을 하지 않고 순차적인 순환을 할 뿐이다. 그걸 다시 새로 경험해 기분이 좋다. 그에 비하면 엘리베이터에서의 역주행은 무시해도 좋을 소소한 일. 


그건 그렇고 나는 셔틀버스 정류장에서 재빨리 줄을 선 다음, 서울에서 하행하는 버스 안 오른쪽 좋은 자리를 차지해 노을을 감상하는 편법을 자주 행할 참이다. 신년부터 새로 바뀐 셔틀버스 안 좌석은 통로보다 높게 설치돼 있고 창 커튼도 좌우로 자유롭게 제칠 수 있어 하늘 감상이 좀 더 수월해졌다. 어느 날엔가 하늘은 이런 나에게 멋진 노을로 미소를 대신할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공기의 느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