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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Jun 29. 2023

무섭기만 했던 아부지였지만

서너 살 때쯤이었을까,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뭔가 궁둥이가 이상했다. 엎드려서 다리 사이를 보니 길쭉한 뭔가가 항문에 매달려 꿈틀대고 있었다.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엄청난 공포에 악을 쓰며 울자 아버지가 달려오셔서는 지푸라기로 그것을 감싸 잡고 빼냈다. ‘껄께이(지렁이, 회충)다, 이제 괜찮으니 울지마라’고 하셨다. 아버지에 대한 첫 기억이다.

아버지, 어머니와 논둑길을 걸어 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여동생을 업고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걷기도 하고 업기도 했다. 그렇게 간 낯선 집에는 사람이 엄청 많았다. 어른들이 술을 마시고 싸움을 하기도 했다. 시꺼먼 안경을 쓰고 싸움을 하는 사람이 무서워 악을 쓰며 울자 그 사람이 쫓아와 우는 나를 달랬다. 그 사람이 더 무서워 더 악을 쓰며 울었다. 후일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때였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한 친구와 함께 아버지를 따라 학교에 갔다. 입학식에 대한 기억은 없는데 집으로 돌아오던 기억은 선명하다. 입학식이 끝나고 학교를 나와 얼마간 걸어가자 나무로 얼기설기 얽힌 다리가 나왔다. 시냇물 흘러가는 모습이 다리 사이로 보여 다리 건너기가 무서웠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다리를 건너자 아버지는 멀리 뻗어있는 신작로를 가리키며 그 길을 죽 따라서 집으로 가라고 하셨다. 그 길만 따라가면 집이 나온다고 하고는 아버지는 어디론가로 가셨다. 얼마간을 그 길을 따라가다가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아 아버지와 헤어졌던 장소로 되돌아가 아버지를 기다리기로 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저 멀리 아버지 모습이 보였다. 우리가 아직 가지 않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아버지는 깜짝 놀라 달려오셔서는 ‘이 큰길을 계속 가기만 하면 우리 집이 나온다. 이 길을 계속 따라 가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또 어디론가로 가셨다. 한참을 그 큰길을 따라가니 엄청나게 큰 못이 보였다. 학교에 갈 때 그 못을 지나간 기억이 났다.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아버지께 학급비를 가지고 가야 한다며 돈 10환을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 않으시고 돈을 주셨다. 학급비로 4환을 내고 남은 돈으로는 볼펜이란 거와 만화책을 샀다. 이웃 형이 칼로 깎지 않고도 계속 쓸 수 있는 연필이라는 꾐에 신기하기만 한 볼펜을 산 것이다. 한 보름쯤 지났을까 저녁상을 물리고 난 아버지께서 느닷없이 지난번에 학급비를 얼마 달라고 했느냐고 물으셨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더듬거리며 10환이었다고 했다. 학급비는 얼마였느냐고 물으셨고 4환이었다고 하자 남은 돈으로는 뭘 했냐고 또 물으셨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오금이 저렸다. 볼펜이란 거와 만화책을 샀다고 작은 소리로 대답을 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금방이라도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아 간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 아버지는 ‘아부지는 안다. 아부지는 다 알고 있다.’ 그 말씀뿐, 혼을 내지는 않으셨다. 그 이후로 아버지께는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여름날 이른 아침, 아버지는 가끔 산딸기가 가득 담긴 놋쇠술잔을 들고 집으로 들어오시곤 했다. 이슬을 함뿍 머금은 산딸기는 무척이나 먹음직스러웠다. 별 표정도 없이 우리에게 산딸기 가득한 술잔을 내미는 아버지를 보면서 왜 아버지는 이 맛있는 산딸기를 잡숫지 않고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걸까 생각했다. 아버지는 산딸기를 싫어하셔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게는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분이었다. 아버지가 조금만 언성을 높여도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집에 아버지가 계실 때는 장난은 고사하고 큰 소리로 떠들지도 못했다. 매 한 번 든 적 없고 손찌검 한번 한 적이 없는 아버지였는데도 그렇게 무섭기만 했다.


아버지는 당신 혼자 사랑방에서 기거를 하셨다. 아버지 방에는 한문으로 된 책이 많았고 벽에는 호랑이 그림과 말을 탄 장군이 칼을 빼 들고 있는 족자가 걸려 있었다. 이순신 장군과 남이 장군의 시도 걸려 있었다.

아버지 방에는 늘 손님들이 북적였다.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은 대부분 그날 떠나지만 간혹 며칠씩 머물다 가는 손님들도 있었다. 아버지는 그분들과 술을 드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고 가끔 골패놀이를 하기도 하셨다. 

손님이 찾아오면 아버지는 나를 사랑으로 불러 손님께 인사를 드리게 했다. 손님에게는 반드시 엎드려 큰절을 드려야 했다. 가끔 돈을 주는 손님도 있었고 글씨를 써보라거나 한자를 읽어 보라는 손님도 있었다. 손님이 돈을 주시면 그걸로 과자를 살 수 있다는 걸 모르던 때라 어머니께 드리곤 했다. 

아버지는 여행을 좋아하시고 또 많이 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자주 집을 비우셨고 집을 나가시면 며칠씩이나 지나 들어오시곤 했다. 아버지가 출타하셔도 어머니나 할머니는 아버지께 어디를 가시느냐고 묻지 않았다. 어머니나 할머니나 아버지가 어딜 가시는지는 별 관심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누나가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서울로 갈 때는 아버지가 선생님과 학생들을 인솔하고 가셨다. 아버지는 할머니도 수학여행에 함께 모시고 가셔서 할머니는 서울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그때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그런 아버지도 비행기는 한 번도 못 타 보셨다고 했다. 

아버지가 출타하고 집에 계시지 않으면 그날은 온전히 나만의 날이었다. 아버지가 집에 계시지 않으면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나가실 기미만 보이면 마음은 날아갈 것 같았다. 심한 장난에 할머니가 빗자루로 엉덩짝을 칠 때도 있었지만 할머니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늦은 가을이면 적당하게 익은 감을 골라 곶감을 만든다. 곶감은 다 말랐을 때보다 말랑말랑하게 익기 시작할 무렵이 훨씬 달고 맛있다. 아버지는 감을 깎아 처마에 매달기도 하고 채반에 널어 말리기도 했다. 채반은 물론 처마에 매단 감이 말랑말랑하게 익을 때부터 아버지는 매일매일 곶감 개수를 셌다. 그래도 곶감은 나날이 개수가 줄어들었다. 아버지가 곶감을 셀 때면 늘 가슴 두근거렸지만 없어진 곶감 때문에 혼난 적은 없다. 아버지는 아예 곶감을 못 먹게 하려는 게 아니라 사라지는 곶감 수를 줄이려고 그러셨던 것 같다. 

여름에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밥을 먹었다. 여름날 저녁은 언제나 칼국수였다. 칼국수 먹기를 끝내면 마당 한구석에 모깃불을 피우고 둘러앉거나 드러누워 할머니나 아버지 이야기를 들었다. 별빛 아래 멍석에서 옛날이야기를 해 줄 때의 아버지는 평소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이때는 아버지 옆에 드러누워서 아버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하늘 높이 가로지른 은하수에 얽힌 견우직녀 이야기를 해주시기도 하고 옛 전설이나 옛 성현들 이야기, 조상님들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어떤 친구가 진정한 친구인지 친구 이야기를 하시면서 친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시기도 했다. 멍석에 누워 하늘에 가득 뿌려진 수많은 별을 보면서 아버지 이야기를 들을 때는 아버지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이 된 3월 어느 날 느닷없이 한마을에 사는 친척 형님이 학교로 찾아와 책가방을 싸서 나오라고 했다. 전학을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등학교가 없는 우리 면에서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시키지 못할까 걱정이 된 아버지께서 형님을 다그쳐 갑작스럽게 전학을 시킨 것이었다. 

방학이 되어 집에 가면 아버지는 가끔 장에 나를 데리고 가셨다. 십리가 채 되지 않은 길인데도 아무런 말씀도 없이 묵묵히 걷기만 하는 아버지를 따라가는 장 길은 멀기만 했다. 그렇게 힘들게 장에 도착하면 아버지는 고깃집으로 데리고 가 돼지고기를 사주시곤 했다. 숯불에 굽는 돼지고기는 냄새만 좋았지 맛은 별로였다. 온통 비계 투성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사랑을 직접 표현하신 적은 없었다. 다정스럽게 말씀을 붙이는 적도 없었다. 그래도 주요한 결정은 내게 맡겼다. 대학에 가야 할 나이가 되자 아버지는 내가 교육대학에 가기를 바라셨다. 성격에 맞을 거라고 했지만 학비가 적게 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졸업을 하면 곧바로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될 수 있는 것도 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 하는 아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아버지 말씀을 거역해 본 적이 없었지만 그때는 내 뜻을 명확히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꼭 그러고 싶으면 그러라고 순순히 응낙을 하셨다. 1차 시험에 낙방을 하고 바로 재수를 하겠다고 하자 또 그러라고 하셨다. 재수를 하고서 또 낙방을 했다. 공부는 하지 않고 놀기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님 뵐 낯이 없었다.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얼마간 방황을 하다가 어쩔 수 없이 집에 들어가자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아들을 만난 듯 와락 껴안고 통곡을 하는 어머니 옆에서 아버지는 그저 머리만 쓰다듬으며 ‘잘 왔다 잘 왔다, 고맙다’는 말씀만 거듭하셨다. 

그렇게 3수만에 대학을 들어가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에만 바빴다. 학교는 제대로 가지도 않았다. 심지어 기말고사 때는 시험도 보지 않고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서울 작은 집에 기거를 하고 있던 때여서 그런 행태를 보다못한 작은 아버지께서 아버지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아버지는 작은 아버지의 편지에 '우리 현석이가 그럴 리가 없다'고 한마디로 자르셨다고 한다. 한참이나 지나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안 나는 아버지의 나에 대한 굳센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되겠다고 굳게 결심을 했다. 얼마후 입영영장을 받고 군대를 가면서 더욱 단단히 다짐을 했다. '무조건 최전방이다, 군에서 어떠한 고생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어려움을 찾아가면서 내 자신을 단련하리라' 굳게 결심을 했다. 실제 그 결심을 굽히지 않고 최전방 말단 소총소대까지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내 마음먹은대로 되는 것은 아니어서 소총소대에서는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가장 편하고 끗발까지 있다는 중대본부 서무계로 불려가 누구보다 편한 군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아버지는 농부셨지만 농사일은 잘 모르셨다. 아버지가 젊으셨을 때는 집안이 꽤 윤택했다고 한다. 공부를 전혀 하지 못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일본에 유학을 보내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유학을 보내지 못하고 독선생을 모시고 집에서 한문 공부만 하도록 했다고 한다. 때문에 아버지는 농사일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물꼬를 보거나 모심기나 벼 베기, 보리 베기 같은 단순한 농사일만 하셨다. 농부시면서도 쟁기질이나 지게질 같은 농사꾼이면 누구나 하는 그런 힘든 일은 하지 못하셨다. 

아버지가 어느 날 저녁 TV를 보다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했다. 급하게 택시를 불러 장터 병원에 모시고 갔지만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가야 한다고 했다. 장이 꼬여서 장 일부가 썩어 가고 있다며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몸이 약해 부분마취만 하고 온몸을 침대에 묶고 수술을 해야 했다. 아버지는 그전에 오랫동안 혈액암 투병을 하시면서 좋아하시던 술도 끊었었다. 고가의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으면서 거의 완치 단계까지 이르러 약주도 한, 두 잔씩 드실 수 있게 되었는데 갑자기 또 엉뚱한 병이 닥친 것이다. 

“내가 환갑잔치를 할 줄 누가 알았노.” 가족, 친척들과 조촐하게 환갑잔치를 하며 좋아하셨던 아버지였다.

“이래 좋은걸 그동안 안 먹꼬 우예 살았노?” 오랫동안 술을 드시지 않다가 처음으로 소주를 한잔 들이키면서 하신 말씀이었다. 아버지는 술을 아무리 많이 드셔도 이튿날 아침이면 가뿐하게 일어나셨고 속이 쓰리거나 머리가 아파본 적도 없다고 하셨다. 술이 잔뜩 취해 돌아오신 다음날도 아침이면 어김없이 일찍 일어나 소죽을 끓이곤 하셨던 아버지셨다.

수술 이후 아버지는 다시 아파 누우셨다. 거의 나았다고 믿었던 암이 다시 준동을 하는 것 같았다. 고가의 주사가 부담이 되어 중간중간 주사를 쉰 것이 원인인 것 같았다. 아버지가 불쌍했다. ‘우리 때문이구나. 우리 자식들 때문에 돈을 아끼셨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대구에 있는 큰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후두암이라고 했다. 그 암이 임파선으로 전이되고 이어 간으로도 전이가 되었다고 했다. 오랫동안 아버지는 입원을 하셨지만 병은 차도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복수가 차고 아버지는 점점 쇠약해져만 갔다. 

아버지 병환이 차도가 없자 주변에서 온갖 민간요법을 들고 왔다. 어떠한 암도 완치시킨다는 사람이 있다며 서울 작은 숙부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알부민 주사를 맞으면서 어떻게든 두 달만 돌아가시지 않게 하고 이 약을 드시게 해라. 무조건 살 수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 병은 내가 안다’고 하시며 그 약을 한사코 드시지 않으려고 했다. 알부민 주사도 몇 번 맞다가 더 이상 맞지 않겠다고 했다. ‘저 아들 정성을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드시라’며 어머니께서 빌다시피 권하자 아버지는 그 이후로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끼니때마다 그 약을 잘 드셨다. 마침내 병원에서 더 이상 가망이 없으니 임종을 준비하는 게 좋겠다고 해 퇴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 와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약을 드시게 했다. 아버지는 눈을 감고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그 약을 받아 드셨다. 

집에 오신 며칠 후 새벽, 아버지는 숨이 점차 약해지고 느려지다가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눈을 감으신 아버지 입안에는 가득 그 약이 그냥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약이 목으로 넘어가지도 않는데도 아버지는 내색도 않으시고 매 끼니마다 약을 받아 드셨던 것이다. 아들이 마음 아파할까 봐, 희망의 끈을 놓아야 하는 아들이 마음 아파할까 그러셨을 것이다. 분노가 끝없이 치밀어 올랐다. 내 자신의 무지에 대한 분노였지만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친 사람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고통 속에 죽어가신 불쌍한 아버지에 대한 애처로움과 아버지를 편히 모시지 못한 회한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어머니는 아버지 머리 맡에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할 사설을 끝없이 쏟아 냈다. 꺼이꺼이 한없이 한없이 울면서, 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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