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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soh Dec 18. 2020

이방인_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믿음사, 2019



오늘 엄마가 죽었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책은 총 270p이고 그중 절반은 소설, 나머지 절반은 작품 해설과 작가 연보로 채워져있다. 소설보다 장황한 설명을 하는 작품 해설을 보면 나는 사실 조금 질려버린다.


믿음사에서 출판된 문학 책은 책 말미에 작품에 대한 해설이 장황하다. 소설을 읽고 나서 사유할 시간이 필요한데 그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 같아 때론 아쉬운 마음이 든다.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작품을 쓴 의도, 배경, 과장된 표현, 시사점 등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긴 어렵다고 생각한다. 카뮈가 남긴 기록을 토대로 남아있는 사람들의 주관적 해석인 것이지 작가의 해석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보다 역자의 해설을 읽고 있노라면 소설속에 침입자가 등장한 것 같아 불편한 마음이 든다. 소설의 부피보다 장황한 해설은 독자를 배려하지 못한 처사라고 생각되어 진다.


읽다 보니 문장과 문장 사이 연결이 매끄럽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어 '이래서 역자를 잘 선택해야 해.'라고 생각했으나, 원서를 고스란히 옮기고자 노력했던 역자의 배려였다고 한다.






그가 고집을 부리는 것은 잘못이고, 그 마지막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나는 그에게 말할까 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말을 가로막고, 다시 한번 벌떡 일어서더니 나더러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으면서 훈계를 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는 분연히 주저앉았다. 그럴 수는 없다고 하며 누구나, 비록 하느님을 외면하는 사람일지라도, 하느님을 믿는 법이라고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신념이었고, 만약 그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해야 한다면 그의 삶은 무의미해지고 말리라는 것이었다. “당신은 나의 삶이 무의미해지기를 바랍니까?” 하고 그는 외쳤다. 내가 볼 때 그것은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도 그렇게 말했다.(p.80)


이 법정에 있어서는 관용이라는 소극적 덕목은, 그보다 더 어렵기는 하지만 더 고귀한 덕목, 즉 정의라는 덕목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특히 이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심리적 공허가 사회 전체를 삼켜 버릴 수도 있는 구렁텅이가 될 경우에는 더욱이 그러합니다.” 그가 엄마에 대한 나의 태도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심리 중에 한 말을 그는 다시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저지른 범죄를 이야기할 때보다 훨씬 더 길었다. 어찌나 길던지, 결국은 그날 아침의 더위밖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p.113)





오늘 엄마가 죽었다.


통상적인 범위에서 엄마가 죽은 일은 슬픈 일이고,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주변의 손가락질이 따라다닌다. 엄마가 죽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이 없는 뫼르소는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장례식 다음날은 마리와 정사도 나누었다. 엄마의 죽음이 뫼르소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엄마가 죽으면 슬플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혹은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일상에서 뫼르소의 행동은 문제 될 게 없지만 사회적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에게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일은 크나큰 잘못이 된다. 그를 잘 아는 주변인들의 증언이 뫼르소에게 호의적이더라도, 검사는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당신이 얻고 싶은 결론을 도출해내기 위해 엄마의 죽음에서부터 그를 단죄한다.


자기 결정권이나 자기방어권은 애초에 없다. 유일하게 그를 판단하는 법정의 검사만이 그의 전부를 결정지으며 그의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나는 이렇게 살았으나,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을 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인가?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신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온 것만 같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그 역이 그 까닭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p.134)




어린이들이 하는 행동은 자연스럽다. 계산적이지 않고 거침이 없다.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더욱 그렇다. 아이들은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사람들의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는다. 엄숙한 장소에서 아이들이 지나치게 떠들어도 비난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어른들이 하는 행동은 부자연스럽다. 계산적이며 이기적이고 때에 따라 선하게 행동한다.


뫼르소의 행동은 자연스럽다. 독립적인 인간으로 보았을 때 그의 행동에서 문제가 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은 일도,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던 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어른(계산적이며 이기적)스럽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행동을 하면 문제가 된다. 손가락질을 당하고 지탄을 받고 말미에는 불손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아니다. 뫼르소가 장례식장에서 울었어도 그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그가 무엇을 했건 검사 앞에선 순간부터 그는 죄인이고 태생부터 범죄자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p.136)


인간은 태어나면 한 번은 죽는다. 그런 의미에서 엄마의 죽음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의 죽음도 자연스러운 일이니 모든 사실과 삶과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독서를 하며 나의 정치적 사상에 크나큰 영향을 준 책은 조지 오웰의 <1984>이다. <1984>를 읽고 나서, 밝고, 맑고, 아름답게만 보던 세상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 부조리를 직면하던 첫 책이었기에 강렬한 자극으로 기억한다. 이 책도 부조리에 맞서 쓰인 책이나, <1984>를 읽을 때만큼 나를 관통할 만한 내용은 없었다.


카뮈는 부정(부조리)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를 긍정하는 단계에서 <페스트>를 썼으며, 사랑에 관한 소설을 쓰기 전에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맞이했다. 



http://aladin.kr/p/OMs25




1913년 11월 7일 알제리의 몽도비에서 아홉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다. 포도 농장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전쟁에 징집되어 목숨을 잃은 뒤, 가정부로 일하는 어머니와 할머니 아래에서 가난하게 자란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각별한 총애를 받으며 재능을 키우다,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대학에 갈 기회를 얻는다. 알제 대학 철학과 재학 시절,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도 창작의 세계에 눈을 떠가는데, 무엇보다 이 시기에 장 그르니에를 만나 그를 사상적 스승으로 여긴다. 1934년 장 그르니에의 권유로 공산당에도 가입하지만 내면적인 갈등을 겪다 탈퇴한다. 교수가 되려고 했으나 건강 문제로 교수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고, 진보 일간지에서 신문기자 일을 한다. 1942년에 <이방인>을 발표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에세이 <시지프 신화>, 희곡 <칼리굴라>등을 발표하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다. 1947년에는 칠 년여를 매달린 끝에 탈고한 <페스트>를 출간하는데, 이 작품은 즉각적인 선풍을 일으키고 카뮈는 비평가상을 수상한다. 마흔네 살의 젊은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지만, 그로부터 삼 년 후인 1960년 1월 4일 미셸 갈리마르와 함께 파리로 떠나다가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이 책의 원제는 étranger. 오늘날 한불사전에서 형용사로 '외국의', '외부의', '국외자의', '낯선', '생소한', '무관한', 이물의', 명사로 '외국인', '외부 사람', '국외자'등으로 풀이하고 있을 뿐 어디에도 '이방인'이라는 표현은 찾아볼 수가 없다. 아마도 그 표현이 일본어에서 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지금도 우리말에서 예외적으로 이 표현이 사용되는 경우가 없지 않겠지만, 이제 '이방인'이라는 단어는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오직 알베르 카뮈의 이 유명한 소설의 제목이나 주인공을 지칭하는 고유한 의미로 굳어 버린 것이 사실이다.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 온 독서 관습을 존중하여 나는 오래 주저한 끝에 결국 그 나름으로 독자적인 울림을 가지게 된 제목의 번역을 바꾸지 않기로 결정했다.(p.183, 역자의 작품 해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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