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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씽 Aug 09. 2016

푸껫에서 여행자 마음의 삶을 되돌아보다

와이프와 함께 한 첫 해외여행

어렸을 땐 빨간 날이 싫었다. 

가난한 집이었지만 귀하게 키워준 부모덕에 가난이라는 때를 묻히고 다니진 않았다. 하지만 일요일이나 명절처럼 집안 식구가 하루 종일 같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큰소리가 났고(거의 대부분은 돈때문이었다), 그 불똥은 나에게까지 튀었다.  특히 명절임에도 아버지 고향에 못 내려갈 상황이 생기면 더욱 심해지곤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명절만 되면 집을 나와 배회하기 시작했고, 돈 없는 학생이 갈 곳이 많지 않았기에 관악산 언저리를 쏘다니다 내려오는 게 고작이었다.

  

이런 일상들의 연속이었으니 여행은 언감생심, 친척들과 함께한 여행 몇 번이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성인이 된 후 한풀이하듯 쏘다녔다. 내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암울한 현실 도피처로 여행을 꿈꾼 듯하다.  말만 성인이지 여전히 좌충우돌, 꿈만 먹고살던 때였으니 호주머니 돈 있을 리 만무했지만 여행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어 틈만 나면 그들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평생 여행이나 하며 살고 싶어 여행기자나 작가를 꿈꾸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소심하고 자신감 없는 성격과 몰아치는 현실에 게으름으로 포장한 체념 속에서 그 꿈은 의도적으로 기억 저 밑으로 내려보냈다. 


몇 번을 읽었는지 닳디 닳은 곽재구 시인의 '포구기행'로나 자위하던 그때쯤 결혼이란 걸 하게 됐고, 나도 모르는 큰 힘에 휩쓸리듯 제주로 내려와 살게 됐다.  밖에서는 와이프 때문에 내려간다 했지만 기실 나를 위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직장생활 안 해도 좋으니 용돈이나 벌면서 사진과 글을 쓰며 살아도 좋다는 와이프의 배려는 마흔 해 넘도록 뭉쳐있던 응어리를 녹일 만큼 큰 위로가 됐지만, 그의 권유대로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으며 사는 대신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면서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생활하고 있다. 



결혼하면서 몇 가지 약속한 게 있다.  

그중 첫 번째는 모든 일의 우선순위를 가족에게 두되, 다만 먼 미래가 아닌 지금 현실에서 실현한다는 것이다. 

남들은 잘나고 싶어서 안달인데 왜 이런 '경쟁력 없는' 생각을 했을까. 

본인들 입에 좋은 맛있는 것을 못 사드시고, 멋진 경치를 구경 못하며 '나중에' '나중에'를 외치며 그렇게 열심히 사셨지만, 결국 여유로운 삶을 살지 못한 내 부모의 모습 때문인지, 그러다 허무하게 쓰러져 저세상으로 가신 아버지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다음이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부지런히 함께 여행 다니며 추억 만들기, 1년에 한 번은 해외로 나가 새로운 것들을 바라보며 머리와 가슴의 그릇 키우기 등이었는데 단 하나도 제대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며 살았다. 나도 '나중에' '나중에'를 외치며. 


일주일에 한 번씩 신문을 만들어야 하는데다 대체인력이 없는 상황에서 8월 첫 주 공통 휴가 외에는 시간 낼 수 없다는 핑계로, 예전보다 무거워진 역할과 책임에 걸맞게 부지런히 활동해야 행복한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강박관념을 피할 수 없었다.  

제주로 내려와서도 첫 해에는 여행자로서의 삶은 사느라, 이후에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암투병과 죽음 등으로 이어지며 휴가를 가 볼 엄두도 내지 못하며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올해  첫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결혼 후 7년 만에 지키게 된 약속. 그것도 남들 한두 번씩 다 가봤다는 푸껫으로.  



어디로 갈까?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막막했다.  

가까운 나라 일본에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와이프를 데리고 일본의 남쪽을 순회하고 올까 생각했지만 갑작스레 치솟은 엔화 때문에 포기, 아버지 제사 끝내고 다녀올 일정으로는 유럽은 다녀올 수 없고... 

휴가기간은 다가오는데 고민만 많았지 결정은 못 내리고, 이러다가는 아예 못 나가겠다 싶어 사이트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장소를 정하고, 정보들을 취합해 일정 구성할 만큼 부지런하지도 못한데다 (나나 와이프나) 언어의 장벽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자유여행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렇다고 경치 구경은 잠깐, 코끼리 타고 악어 입 벌리는 쇼나 구경하다 '억지 관광'을 해야 하는 패키지여행을 하는 게 맞나 고민하던 중 이야기로만 듣던 '클럽 메드'가 눈에 들어왔다. 


리조트 예약만 하면 식사부터 음료까지 하루 종일 제공하고, 각종 레포츠를 체험을 비롯해 다양한 이벤트들과 밤마다 다른 테마로 파티가 열리는 시설. 어디를 돌아봐야 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이 게으르게 쉬다 먹다 자다 놀다 올 수 있으니 우리 부부에게는 최적이겠다 싶었다. 

하지만 가격이 만만찮은데다 원하는 지역의 클럽메드는 이미 마감, 고민 끝에 바다 좋아하는 신랑을 고려한 푸껫행 티켓을 끊게 됐다. 


와이프의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원껏 물놀이를 하지 못한 게 아쉽고, 안전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기본 수영실력이 있는 이들만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스노클링 프로그램에 함께 하지 못한 것, 언어에 대한 부담 때문에 

푸껫에 가면 꼭 가봐야 한다는 피피섬이나 팡라오 등 대표적인 자연경관을 구경하지 못한 것은 무척 아쉽다. 


하지만 일상에서 벗어나 느긋하게 물놀이도 즐기고, 낮잠도 자고 이것저것 잡생각도 하나 책도 읽는 여유, 주변머리 없는 신랑 때문에 결혼 후 단 한 번도 근사한 레스토랑 가본 적 없는 와이프와 야외 테이블에서 와인을 마시며 쇼를 구경할 수 있는 이벤트 기회가 생긴 것은 이번 여행이 준 큰 행복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 지금의 일상에서도 충분히 이렇게 살 수 있지만 잊고 살았다는 점, 옛 약속을 떠올리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 새롭게 다짐하게 된 점이다.   



이번 여행을 계기로 서핑에 도전해 볼 용기가 생겼다 

여행자와 같은 삶. 

삶이라는 각축장 밖에서 주변인처럼 행동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즐겁고 재밌고, 의미 있는 일만 하며 살더라도  짧은 인생, 굴레나 틀에 얽매이지 말고 여행자같이 즐겁고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기껍게 살아가자 마음먹었건만 삶의 무게 때문인지, 적응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는지, 오히려 예전의 틀과 지금의 모습이 뒤죽박죽 섞여 혼란스러웠던 마음의 실타래 한쪽 끝이 풀리는 듯싶다. 


여행의 소중함, 가족을 만들며 한 생각, 내려오면서 다짐했던 마음들... 

이래서 떠나야 하는데,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움켜쥐려 했나 보다. 

있는 공간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즐기려는 마음,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기대감,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 정신,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무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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