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어느날 아침.
전날 친구들과 기분 좋게 한잔 하느라 많이 마시긴 했지만 영 느낌이 별로다. “숙취라고는 겪어본 적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특히 왼쪽 가슴팍으로 전해오는 찌릿한 통증. 그동안 과신했나, 영 마음이 쓰였다.
오전 배달을 마치자마자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검색을 시작했다. 심근경색 초기증상. 갑작스럽게 가슴에 통증과 싸한 느낌이 전해진다고.
“이거 내 증상인데?”
혈관 내부가 손상되면 생기기 쉽고, 날씨가 추운 겨울철에는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로 인해 나타난다니 더 신경쓰인다.
이 일을 시작하며 20kg 가까이 살이 빠지는 통에 예전 총각때 몸매로 돌아왔고, 고지혈증과 비만도 사라졌다. 혈압이 높긴 하지만 늘 혈압약 챙겨먹고 있으니 걱정할 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무리한 게 원인일까?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소화도 잘 안되는 것 같고, 먹고 나서도 더부룩해 자주 탄산음료를 찾았던 게 떠올랐다.
“이러다 덜컥 아파서 입원이라도 해야 하면 어떻게 하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욱 하는 마음에 때려치우고 나온 회사가 떠올랐다. 이런 조직에서는 더이상 못있겠다며 10년 넘게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그때는 1년에 한번 정기검진이라도 받았는데......” 미울 때가 더 많았지만, 이런 고민을 할 때 이야기할 상대라도 있었는데.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얼마 안 되는 퇴직금은 지금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야금야금 까먹었고, 그나마 남은 돈은 이 트럭을 사는데 탈탈 털었다. 셋째인 막내가 태어나자 집이 좁다며 밖으로만 나도는 큰 아이를 생각해 방 3개짜리 아파트로 이사 오는 게 아니었다. 지금이 적기라며 차라리 사는 게 낫다는 전 직장동료의 꾐에 넘어가지만 않았어도, 매달 적지 않은 돈을 은행에 갚아야 할 처지만 아니더라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이렇게 불안하지는 않을 텐데.
“아니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고, 주말도 없이 일해야 하지만 마음은 편했다. 일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예전처럼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사장님이라 불러주는 게 좋았고, 새로 들어온 후배 사장들이 대우해주는 게 좋았다. 바쁜 남편을 대신해 아이 셋을 돌보느라 갈수록 초췌해져 가는 와이프가 안쓰럽긴 했지만 그건 아내의 몫, 애들 다니고 싶어 하는 학원도 보낼 수 있고, 호기롭게 술값 계산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좋았다.
“일주일만 쉰다고 할까?” 우선 검진이라도 받고 어떻게 치료 받을지 고민하려면 그 정도 시간은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누가...” 물건을 대주는 영업소장의 얼굴을 떠올리자 어깨가 축 쳐졌다. 말이 사장이지 하루라도 물량을 채우지 못하면 난리가 났다. 몸살때문에 열이 펄펄 끓어 올라도 할당량은 채워야 한다. 올해로 5년차라는 김씨는 아버지 장례식에도 빨간 날 하루밖에 못 쉬었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생각이 많아지니 들고 있는 짐의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진다. 잠시 숨 돌리며 끊었던 담배 한가치를 물고 다시 검색하기 시작했다. 가슴통증이 더 심해져오는 듯하다.
“이렇게 일하다 갑자기 쓰러지면 어떻게 하지? 초기 대응이 중요하다던데. 증상이 나타난지 한 시간 이내에 사망하는 돌연사 가능성이 높다던데.”
어떻게 저녁 일을 마무리 했는지 모르겠다. 맨 정신으로는 집에 가기 힘들어 동네 술집을 찾았다.
“내가 갑자기 죽으면 어떻게 하지? 그때 사망보험 이야기 물어볼 때 화내지 말걸. 그래도 가입했을 거야. 얼마나 받을까? 차라리 한 번에 죽어야지, 괜히 쓰러졌다간 병원비 감당 못해 집안 거덜 나고, 아이들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 어떻게 하지. 그렇게 되면 돈 안받는 시설로 보래라고 이야기 하자.”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빨리 아내에게 달려가 고백해야만할 것 같았다. 달음질쳐 집앞까지 왔건만 들어갈 엄두가 안 난다. 담배 한가치를 꺼내 물었다. 오늘도 막내가 칭얼거리는지 아이를 업은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재빨리 담배를 끄고 달려가 아이를 안았더니 화를 낸다.
“내가 담배냄새 그렇게 싫어하는 거 몰라? 아이들한테도 안 좋고. 밤에는 안 피우기로 약속했잖아.” 너 싫은 것만 생각하고, 나 좋아하는 건 들어줄 생각은 못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버린 담배꽁초나 주워서 오라는 호통에 문 밖을 나서는데 눈 주위가 뜨거워진다.
가난한 나에게 시집와 하던 공부도 때려치우고, 남들 다가는 해외여행 한번 못가보고 고생만 시킨 아내에게 어린아이들까지 남기고 떠나야 한다니. 마음이 착잡했다.
집에 들어오자 와이프의 가시섞인 음성이 날라온다. “어제도 그렇게 퍼 마시고 오늘 또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드냐?”
빨리 나의 아픔을 이야기해야 하는데...도통 타이밍을 찾을 수가 없다. 고개를 푹 숙인채 냉장고서 꺼낸 물을 벌컥 벌컥 들이키는데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묻는다.
“가슴은 괜찮아?”
어랏. 내가 가슴 아픈걸 어떻게 알았지? 잠 잘 때 신음소리를 냈나? 아내도 내가 아픈걸 알고 있었나?
“어...안그래도 내가 그거 때문에 당신한테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말이지.”
“뭐? 병원은 가봤어? 그러게 작작 좀 퍼마시고 다니라고 했지.”
“..............”
“또 한 번만 그래봐라. 동네 창피해 죽겠어. 왜 술만 마셨다 하면 그렇게 고래고래 노래를 불러대? 어제는 누구랑 술 퍼마신거야? 이기질 못하면 마시질 말던가. 제대로 걷지도 못해 난간으로 엎어지질 않나. 그만했으니 망정이지 앞으로 고꾸라져서 이빨이라도 부러지면 참 보기 좋겠다.”
잠시도 쉬지 않고 아내가 퍼부어댄다. 텔레비전에 열중하던 아이들이 무슨 일 있나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식탁 앞으로 모여든다.
음식냄새가 난다. 한창 퍼붓던 아내가 얼큰한 김치 콩나물국을 내온다.
시원하다. 통증이 싹 사라졌다.
내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작작 술 먹자.
술 먹어도 꽐라되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