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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씽 Jul 21. 2016

내 감귤밭이 생겼다

[초보 농부 이야기 1] 

흙을 만지게 될 줄 정말 몰랐다. 

아파트라는 막힌 공간에서 10대와 20대를 보냈으니 흙과 친할 시간이 없었고, 촌이라고 내려가 봤자 농사짓는 분이 없었기에 농촌과 흙이 있는 삶이란 티브이 속 이야기일 뿐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평생에 가장 흙을 많이 만졌던 때는, 다른 이들도 비슷하겠지만, 군대 시절이었다. 

입대 후 대기병 시절, 초소 위치를 새기고 몰래 숨겨놓는 물건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배우며 중대 경계선을 순찰했는데 그때 산속에 열린 자두와 뽕나무 열매가 얼마나 신기하던지. 


네온사인이 없으면 허전함을 느끼던 내가, 도심 속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내가, 평생 펜대나 굴리며 쳇바퀴를 반복할 거라 생각했던 내가 어느 날 문득 '이 곳을 떠나고 싶다' 생각했다. 

나와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고 사는 게 부담스러웠고, 남을 위해 사는 삶이 힘겨웠다. 남을 위한 답시고 우리 부부가 힘겨워지는 게 싫었다. 

"이제는 승승장구, 쭉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이야기도 버거웠다. 일 속에서의 삶은 어떨지 모르지만 내 주변은 점점 피폐해지고 있구나를 느낄즈음 우스갯소리처럼 떠들고 다니던 '로망'이 떠올랐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소일거리 하면서 사진 찍고 어슬렁 거리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면 사람들 불러다 소주 마시며 사는 인생' 



내가 키워야 할 감귤밭 모습


그리 놓을 것도 없었지만 놓아야 했고, 상처도 있었지만 제주로 내려와 살게 됐다. 제주출신인 와이프 덕분에 많은 이들이 겪는다는 텃세 안 겪었고,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 잘 정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 생각했던 한량과 같은 삶은 꿈속에서의 이야기에 불과하고, 여기나 거기나 별반 다를 것 없는 일상 속에서 답답함과 고민이 깊어질 무렵 만난 '흙'이라는 존재는 바다와는 또 다른, 묘한 위안을 줬다. 


우연찮은 기회에 감귤밭에 따라다니게 됐고, 십수 년 만에 삽과 낫도 잡아보며 경험이 쌓이다 보니 '나도 농사를 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물론 농사를 업으로 해 식구들 건사하며 먹고살려면 적지 않은 규모로 해야 하고, 안정적인 수익을 거둘 자신도 없기에 전업할 용기는 없지만 그래도 '내 밭'이 갖고 싶었다. 하다못해 작은 텃밭이라도 내가 기르고 키우고 수확해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갖고 싶었다. 


"감귤밭을 빌려볼까?"

조만간 지금 있는 전셋집에서도 나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없는 돈에 감귤밭을 빌려 농사지어보겠다는 이야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회사 다니면서 잘 기를 자신도, 실력도 없었고.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우리 집에서 10분 거리, 월산에 감귤밭을 갖고 계신 형님이 자신의 밭 한쪽에서 농사를 지어보라며 선뜻 밭을 빌려주셨다.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고, '여기부터 여기까지가 네 것'이라는 표식도 없지만 그래도 1년간 내 땅이 생긴 것이다. 아니 내 귤밭이 생겼다! 



잘자거라 감귤나무야 


마흔 넘어서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자며 '잘할 수 있는 것', '잘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찾은 제주살이. 난생처음 하는 일에 좌충우돌, 잘한 선택인가 고민도 많았다. 그랬던 나에게 '잘하고 싶은 것', '재밌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생겼다. 


내 귤밭이 생겼다. 

(이 자리를 빌어 감귤밭을 흔쾌히 빌려주신 문태권 형님께 고마움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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