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농부 이야기 1]
흙을 만지게 될 줄 정말 몰랐다.
아파트라는 막힌 공간에서 10대와 20대를 보냈으니 흙과 친할 시간이 없었고, 촌이라고 내려가 봤자 농사짓는 분이 없었기에 농촌과 흙이 있는 삶이란 티브이 속 이야기일 뿐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평생에 가장 흙을 많이 만졌던 때는, 다른 이들도 비슷하겠지만, 군대 시절이었다.
입대 후 대기병 시절, 초소 위치를 새기고 몰래 숨겨놓는 물건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배우며 중대 경계선을 순찰했는데 그때 산속에 열린 자두와 뽕나무 열매가 얼마나 신기하던지.
네온사인이 없으면 허전함을 느끼던 내가, 도심 속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내가, 평생 펜대나 굴리며 쳇바퀴를 반복할 거라 생각했던 내가 어느 날 문득 '이 곳을 떠나고 싶다' 생각했다.
나와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고 사는 게 부담스러웠고, 남을 위해 사는 삶이 힘겨웠다. 남을 위한 답시고 우리 부부가 힘겨워지는 게 싫었다.
"이제는 승승장구, 쭉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이야기도 버거웠다. 일 속에서의 삶은 어떨지 모르지만 내 주변은 점점 피폐해지고 있구나를 느낄즈음 우스갯소리처럼 떠들고 다니던 '로망'이 떠올랐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소일거리 하면서 사진 찍고 어슬렁 거리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면 사람들 불러다 소주 마시며 사는 인생'
그리 놓을 것도 없었지만 놓아야 했고, 상처도 있었지만 제주로 내려와 살게 됐다. 제주출신인 와이프 덕분에 많은 이들이 겪는다는 텃세 안 겪었고,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 잘 정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처음 생각했던 한량과 같은 삶은 꿈속에서의 이야기에 불과하고, 여기나 거기나 별반 다를 것 없는 일상 속에서 답답함과 고민이 깊어질 무렵 만난 '흙'이라는 존재는 바다와는 또 다른, 묘한 위안을 줬다.
우연찮은 기회에 감귤밭에 따라다니게 됐고, 십수 년 만에 삽과 낫도 잡아보며 경험이 쌓이다 보니 '나도 농사를 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물론 농사를 업으로 해 식구들 건사하며 먹고살려면 적지 않은 규모로 해야 하고, 안정적인 수익을 거둘 자신도 없기에 전업할 용기는 없지만 그래도 '내 밭'이 갖고 싶었다. 하다못해 작은 텃밭이라도 내가 기르고 키우고 수확해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갖고 싶었다.
"감귤밭을 빌려볼까?"
조만간 지금 있는 전셋집에서도 나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없는 돈에 감귤밭을 빌려 농사지어보겠다는 이야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회사 다니면서 잘 기를 자신도, 실력도 없었고.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우리 집에서 10분 거리, 월산에 감귤밭을 갖고 계신 형님이 자신의 밭 한쪽에서 농사를 지어보라며 선뜻 밭을 빌려주셨다.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고, '여기부터 여기까지가 네 것'이라는 표식도 없지만 그래도 1년간 내 땅이 생긴 것이다. 아니 내 귤밭이 생겼다!
마흔 넘어서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자며 '잘할 수 있는 것', '잘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찾은 제주살이. 난생처음 하는 일에 좌충우돌, 잘한 선택인가 고민도 많았다. 그랬던 나에게 '잘하고 싶은 것', '재밌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생겼다.
내 귤밭이 생겼다.
(이 자리를 빌어 감귤밭을 흔쾌히 빌려주신 문태권 형님께 고마움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