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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윤서 Feb 10. 2021

시험은 ing...

               

서술형 답안지 속 메시지

 시험이 끝나고 서술형 답안지를 채점할 때면 비록 점수는 0점이지만, 답안지 사랑의 메시지로 인해 미소 짓게 되는 순간이 있다. 비록 공부는 안 했더라도 빈 백지를 보고 속상해할 나를 위해 준비한 애교 가득한 마음 씀씀이는 100점이다.


 잘 모르는 문제가 출제되었을 때 객관식은 1,2,3,4,5번 중 하나를 본인만의 찍기 방법으로 선택할 수 있지만, 서술형 답안은 생각이 안 날 경우 막막하다. 일찍 시험을 포기한 학생들은 OMR카드에 컴퓨터 사인펜으로 똑같은 번호로 쭉 찍고 책상에 엎드려서 모자란 잠을 청하기도 한다.    


 중, 고등학교 때 내가 썼던 객관식 문제 찍기 전략은 첫째, 모든 과목에서 모르는 문제가 나올 때마다 무조건 한 번호로 찍는 것이다. 괜히 어설프게 이것저것 숫자를 바꿔가면서 찍었다가 시험지에 빗줄기가 와장창 떨어지던 날들도 있었다.

 둘째, 가장 단순하게 연필이나 지우개의 각 면에 숫자를 써놓고 지우개나 연필을 책상 위에 굴려서 멈췄을 때 나오는 숫자를 정답으로 적는 방식이다. 그야말로 운에 맡기는 것이다.

 셋째, 고개를 들고 교탁 앞에 놓인 시계를 보았을 때 초침이 가리키는 숫자를 보고 찍는 방식이다. 만약에 5를 넘어가는 숫자라면 나만의 계산식을 만들어서 7초라고 하면 5를 빼서 2번, 10으로 딱 떨어지는 10~50초는 앞자리 숫자, 나머지는 뒷자리 숫자를 선택했다.

 마지막 방법은 시험 시간이 넉넉하게 남았을 경우인데, OMR카드에 마킹 한 숫자들을 나열한 다음 가장 빈도수가 적은 번호를 선택하는 것이다. 총 25문제라고 가정한다면 1,2,3,4,5번 정답이 골고루 5번씩 나올 거라고 예상하고, 내가 마킹 한 정답 중에 가장 횟수가 적은 번호를 선택하는 확률 게임을 했었다.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과 정답을 맞혀보며 채점할 때, 공부해서 맞춘 문제보다 찍어서 맞춘 시험 문제 하나가 전체의 시험 컨디션을 좌우할 정도로 짜릿한 여운을 남긴다.     



 

 학창 시절에는 인생에서 가장 큰 시험이 대학 수능시험인 줄 알았고, 10대 시절 전체를 이 시험 하나를 위해 고달프게 달려왔다. 왜 그때는 누군가 내게 알려주지 않았을까? 그게 시험의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고... 곧 나이가 40인데 난 아직도 시험을 준비 중이다. 늦깎이 대학원생으로 퇴근 후에는 학생 모드로 돌입해 코앞으로 다가온 종합시험을 대비한다.     

 

 시험이 다가올수록 마음속 불안심리는 증폭되고 여러 가지 잡생각들이 괴롭힌다. ‘공부한 범위 이외의 다른 부분에서 출제되면 어떡하지? 도대체 이 페이지를 몇 번째 보는데 왜 머릿속에 안 들어오는 거지? 오늘따라 왜 유난히도 이렇게 책상 정리가 하고 싶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 뒤늦게 대학원까지 들어와서 이렇게 힘든 공부를 하고 있을까?’ 잡생각들이 올라올 때마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예상 답안을 점검해 본다. 잠깐 눈을 붙여보지만,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을 꾸거나 나 혼자만 종합시험에서 떨어지는 불길한 꿈의 연속이다. 불안과 스트레스는 바로 예민한 대장에 신호를 보내서 항상 시험이 임박해 올수록 화장실을 왔다 갔다 반복해가며 초췌한 거울 속 자아와 대화를 나눈다.     

 

“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사실 난 성장과정 중에도 시험불안증상이 꽤 심한 학생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불안을 잠재우는 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학습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야 공부에 완벽이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학교 학부시절, 분명히 공부한 내용인데 시험지를 받는 순간 머릿속이 멍 해지면서 텅 빈 답안지에 한 줄도 써 내려가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갑자기 머릿속에 하해 졌다는 말은 공부 안 한 학생들이 하는 핑계이거니 했는데, 내가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이야. 그동안 공부에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억울하기도 하고 너무 속상해서 한 동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학생들의 서술형 답안지를 채점할 때마다 빈 백지에 교수님을 향한 편지글로 빈 공간을 채우고 다음 학기 재수강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찌 시험뿐이겠는가? 잃어버린 지갑의 행방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에 관한 미시적 문제들부터 집값 안정, 환경문제, 소득의 양극화, 코로나 19 상황 등의 거시적 문제까지 우리는 각각의 위치에서 시간을 두고 해결하면 풀 수 있거나 혹은 풀리지 않은 문제들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생은 시험의 연속이다. 너무나 다행인 건, 오롯이 외롭게 홀로 공부하며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인생은 빈 백지로부터 시작해 각자의 방식대로 채워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채워나가는지에 따라 인생은 달라질 테니까. 인생은 1,2,3,4,5번으로 딱 정해진 객관식이 아니라 참 다행이다. 앞으로 그려나갈 나머지 인생의 답안이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지만, 지금 쌓아가는 오늘이 바로 그 미래의 모습이지 않을까? 그래, 이렇게 난 오늘은 산다.


사진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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