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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윤서 Feb 03. 2021

선생님,저 기억하시나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제자들을 우연히 마주칠 때가 있다. 먼저 날 알아봐 주는 경우, 학생 이름이 딱 떠오르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해 난감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다행히 “선생님, 저 기억하시나요? 어느 학교 누구입니다.”라고 말해주면 그다음 대화를 이어나가기가 수월할 텐데, 대부분은 학교 이름을 빼고 “저 누구입니다.”라고만 한다. 그때부터 내 머릿속은 그동안 일 해왔던 중학교, 인문계 고등학교, 예술 고등학교, 특성화 고등학교까지 학생과의 접점을 찾아내느라 분주하다. 혹시나 학생이 실망할까 봐 기억이 안 난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다. 내가 그 학생을 정확하게 기억해 내는 여부와 상관없이, 잠깐 마주하는 그 짧은 사이에 서로의 근황을 묻고, 다음에 꼭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진다. 대부분은 만나자고 말만 해 놓고 지켜지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날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학생들과 홍대에 있는 보드게임 카페에서 게임을 즐기던 중, 저쪽에서 누군가 내게 인사를 했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다행히 내가 딱 하고 봤을 때 정확하게 기억이 나는 학생이었다. 용산고 2학년 2반 김기범이었다. 2반은 내가 부담임 선생님이었는데, 그 당시 20대였던 나를 연예인들이 누리는 인기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여신 대접을 해 주던 반이라 기억이 또렷하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귀여운 눈매, 통통한 볼 살이 여전히 고등학교 때의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여느 제자들과 똑같이 꼭 다시 만나자는 다음 약속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며칠이 지나고, 돌아오는 3월 3일이 삼겹살 데이니까 그때 시간 괜찮으면 만나자고 다시 기범이가 연락해왔다. 이렇게 연락이 와서 만남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극소수다. 대부분은 전화나 문자로 안부를 묻고, ‘다음에 꼭 찾아뵐게요. 그때까지 안녕히 계세요.’라는 인사가 대부분이다.


 약속을 실천으로 옮기는 기범이가 고마웠다. 기범이는 그냥 의미 없이 건네는 ‘언제 한 번 밥이나 먹자.’가 아닌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함께 하자는 구체적인 약속을 제안했다. 선생님, 3월 3일 저녁 6시, 홍대 입구 역 9번 출구에서 만나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어떠신지요? 제자들이 성인이 되면 꼭 술 한 잔 기울이며 인생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 순간이 오길 바랐는데, 기범이가 내 소원을 이루어주었다. 고기 집에서 자리를 잡고 앉는데 기범이가 겉옷을 벗어도 되냐고 묻는다. 고기 냄새가 베이니까 당연히 겉옷은 벗어서 따로 보관해야 할 것 같아서 별 뜻 없이 벗으라고 했다. 그러자, 본인 팔에 용문신이 있다고 했다. 순간적으로, 문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내 머릿속을 가득 매웠다. ‘작곡가라고 음악 좀 한다더니 겉멋이 일찍 들었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용 문신을 바라보는데, ‘선생님, 이 용은 제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새긴 거랍니다.’라는 한 마디에 순간 스쳤던 내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왜 하필 용 문신을 팔에 새기었을까?



제자와의 첫 소 주 한 잔

  소주 한 잔과 함께 기범이는 담담하게 그날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여느 때처럼 가족들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잘 준비를 하고 잠이 들었다고 한다. 새벽 무렵,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놀라 이불을 박차고 나가보니, 아버지는 화장실에서 쓰러져 이미 하늘나라로 돌아가신 후였다고.. 너무나 허망하게, 인사 한 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홀로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리는 의미로 아버지의 띠가 용띠라서 용 문신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지금 안 계시지만 항상 이 문신을 보며 아버지와 함께라는 생각을 하며 지낸다고 하였다.


 그야말로, 몽둥이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용 문신을 딱 마주했을 때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던 선입견과 편견 때문에 이야기를 듣는 내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기범이처럼 누군가를 기리기 위해 혹은 사랑의 증표로, 또는 몸에 생긴 상처나 점을 가리기 위한 착시효과의 방법 등으로 문신은 누군가에게 위로와 위안을 주는 기능을 할 수 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기범이는 이 방법을 택했을 뿐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 사연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제대로 알고 경험하기 전에 어쭙잖게 쌓인 지식의 모순들과 억지로 맞춰가며 섣불리 판단해버리고 넘어가 버리는 경우가 이 번뿐만이 아니었다. 기범이의 담담한 울림이 내 안의 선입견과 편견을 채찍질해 주는 회초리가 되었다. 본인이 음악을 작곡하는 공간에 놀러 오라며 우린 그렇게 다음 약속을 기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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