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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el Jan 26. 2020

아셴바하 이해하기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읽고

예술가의 삶,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업 생각하게 되었다. 예술, 혹은 (아셴바하에 따르면) "정열을 바탕으로 한 모험가의 불굴의 삶"은 타치오를 몰래 쫓는 장면으로 제시된다. 아셴바하의 타치오에 대한 감정을 공감하기란 어려웠으나, 그것이 '완벽한 아름다움'에 대한 예술가의 집착을 말한다면 이해되는 면이 있다. 그렇다 해도 자신을 내려놓으면서까지 쫓아다녀야 했는가는 의문이다. 비극으로 막을 내리지만, 그것이 아셴바하의 숙명이었다. 리도를 벗어날 기회가 있었으나 돌아오지 않았나.


아셴바하같은 예술가에겐 아름다움을 는 눈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 무엇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가? 더 일반적으로 말해, 인간이 반응하는  속성이 있다면 무엇일까? 작가 토마스 만이 생각하는 답변이 작품녹아 있었다. 건져낸 단서를 정리하면서, 어려웠던 에 대한 감정이입을 대신해보았다.


비일상성이 빚어내는 의 요소에 주목해야 한다. 타치오에게 매혹된 아셴바하는 휴가 중이었다. 휴가는 비일상적 이벤트다. 아셴바하의 감수성은 단조로움으로 대표되는 독일 생활을 벗어나며 한층 날카롭게 작동하였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도 일상의 일부가 되면 가치를 잃는다는 주장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흔하게 볼 수 있다면 (그가 타치오에게 그랬듯) 보고픈 마음이 그렇게 줄기차게 일어날 리 없다. 비일상성의 극한위치한다 할 죽음이 결말이란 점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아름다움의 강조를 위해서는 대비(contrast)가 효과적이다. (침울한 독일의 분위기 대신 밝은 태양의 남유럽이 무대로 설정된 것에서 대조가 작품 구성의 한 축임다.) 아셴바하는 어떤 대상에게는 적의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데, 예를 들어, 젊은이 흉내를 내는 노인을 만났을 때 매우 불쾌해했다. 러시아인들의 세련되지 못함, 나폴리 출신 가수의 기괴한 외모도 마음을 편치 않게 만들었다.


남의 추한 모습을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이라면,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 욕구를 가진 것이 분명하다. 두 감정은 동전의 양면이다. 아셴바하의 내면이 바로 그랬다. 아름다움은 (본인이 그렇지 못하다는 이유로) 스스로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 수치의 감정은 전염병의 감염이 의심되는 위중한 상황에서조차 그가 육신의 늙음을 의식하며 화장 같은 몸단장에 기이하게 몰두토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가 타치오의 병약한 모습에 묘한 만족감을 드러내는 장면이 다. 아름다움의 속성 중 '손상될 수 있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지거나, 잃어버리거나, 빼앗길 수 있음을 걱정하는 의 불안한 심리가 자주 묘사된다. 타치오의 가족이 떠나면 어떡하나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타치오가 야슈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느꼈을 법한 감정도 이 속성과 맞닿아 있다. 이런 정서는 아름다움이 보다 증폭된 형태로 느껴지게 하요소이기도 하다. 의외의 모습을 보이고, 약점이 있으며, 손 안에서 곧 없어질지 모른다는 특성은 더욱 강렬하게 마음이 동하게 한다. 작품 속에선 전염병 창궐이라는 두렵고도 불확실한 상황 설정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분위기의 묘사, 특히 후반부 스산한 공기를 언어로 풀어내는 지점은 압권이었다. 예를 들어, 후각이 전달하는 미묘한 정보 - 썩은 물의 냄새, 소독약의 냄새 - 는 전염병이 주는 불길한 느낌을 전달함과 동시에 개운치 않은 여운이 읽는 내내 남도록 했다. 아셴바하의 심리상태에 따라 눈앞 풍광이 바뀌는 걸 눈치챘다. 그렇게 하늘의 빛깔, 바다의 색은 수시로 다르게 그려진다. 내게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인간 인식 체계의 한 측면이 노출된 것으로 읽혔다. 죽음을 앞둔 아셴바하의 꿈속 사이키델릭한 장면, 물가의 타치오를 보며 경험하는 몽환적 풍경의 이미지도 놀랍도록 훌륭했다. 영화화된 동명의 작품에는 어떻게 그려졌을까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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