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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Apr 15. 2024

'잔루' 싫어요

짠한 존재가 아닌 자랑스러운 존재로. 

요즘 잔루에 대해 생각한다. 잔루란, 야구에서 공격이 끝나고 수비로 바뀔 때 누상에 주자가 남아있는 걸 말한다. 1, 2, 3루에 주자가 모두 있었어도 소용없다. 3 아웃이 되면, 바로 공격과 수비가 바뀐다.     



최근 롯데 자이언츠의 잔루가 많다. 잔루가 너무 아깝고 아쉽다. 점수가 되지 못하고 이닝이 종료됨과 동시에 사라지는 잔루. 누군가 하나만 쳐주면, 그게 다 점수가 되는데. 요즘 경기를 볼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하나만”이다. 남편과 나는 두 손을 꼭 쥐고 “하나만, 하나만 하자.”라고 말한다. 그 하나가 어찌나 어려운지. 그런데 상대 팀은 그 하나를 또 얼마나 잘 해내는지. 내가 우리 팀에 바라는 그 하나를 쫙쫙 뽑아낸다.   


   

가끔 보드게임의 말판을 떠올린다. 내가 주사위를 던져서 꽝이 나와도 내 차례가 되면 처음의 출발 지점이 아닌 바로 그전에 있던 지점에서 시작한다. 야구도 그전에 끝난 곳에서 다시 시작되면 좋으련만. 이닝이 종료되기 전에 1, 2, 3루에 주자가 있었다면, 다음 이닝이 시작될 때도 그렇게 똑같이 시작되면 좋으련만. 그렇다면, 우리 팀이 꼴찌는 아닐 텐데.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서 열심히 방망이를 휘두른다. 아니다. 방망이만 무작정 휘두르지 않는다. 투수가 던진 공을 잘 보고 스트라이크에만 반응하려 노력한다. 투수의 노림수를 계산하고 공을 잘 봐서 안타 혹은 볼넷으로 출루를 한다. 이 과정도 얼마나 치열하지 모른다. 공 하나에 한숨을 쉬고 소리를 지른다. 쉬운 게 없다. 그렇게 1루에 갔고, 또 다른 주자가 잘해 줘서 2루에 갔고, 또 다른 주자 한 명이 또 안타를 쳐서 1루와 2루 그리고 3루에 주자가 쌓였다. 그렇게 주자가 3명인데, 홈런을 치면 4점을 얻는데, 우린 그 상황에서 아웃 카운트도 착실히 쌓아 결국 이닝이 종료된다.    


  

나도 모르게 ‘으아아아악!’ 소리를 지른다. 잔루가 많은 롯데 자이언츠가 꼭 나같이 느껴진다. 이건 롯데가 못할 때마다 이상한 동질감을 느끼는 고질병이다. 아니, 왜 팀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건가.     


고척 스카이돔에서 키움이 이기고 있을 때. 키움 팬들이 빛이 나는 응원봉을 흔드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난 물론 씁쓸했지만.

마음에 드는 공모전을 찾아 기준에 맞게 작품을 쓴다. 여러 번 퇴고한 작품을 송고한다. 자, 일단 출루했다. 이제 작품이 알아서 할 차례다. 내 작품은 1루까지 갔을까, 2루까지 갔을까, 안타깝게 3루까지 가고 탈락했을까. 홈으로 들어오지 못한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새 작품을 쓸 땐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이다. 조금도 수월하지 않다.   


  

어떨 땐, 홈으로 들어오는 게 공모전 당선이 아니라 좋은 글 하나를 완성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문장을 다듬고 다듬지만, 결국 하나의 글 꼴이 되지 못하고 흐지부지된다. 출력한 종이는 퇴고를 하다 하다 답이 나지 않아 구겨진 채로 재활용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또 어떨 땐 출루하고 1, 2, 3루를 거쳐 홈으로 오는 게 꼭 나의 하루 같기도 하다. 난 집에 있으면 일에 잘 집중하지 못한다. 하루가 그냥 가버린다. 우선은 무조건 나가야 한다. 

“일단 출루를 하자, 출루를.”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혼잣말을 한다. 일단 카페나 도서관에 가면, 뭐라도 한다. 나의 돈벌이인 편집 일을 하거나 아무도 관심 없는 원고나 기획안을 쓴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언젠가는 뭐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진다.  


   

그러니까, 그 희망이 문제다. 일단 타자가 누상에 나가면 희망이 생긴다. 홈으로 들어와 점수가 될 거라는 희망. 그렇게 마음이 붕 떴다가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이닝이 종료되면 붕 뜬 마음이 아래로 가라앉는다. 빵빵했던 마음에 쉭, 바람이 빠진다. 


     

1: 8로 키움에게 진 후, 팬들에게 인사하고 들어가는 롯데 선수들. 인사를 하고 고개를 숙여 들어가는 모습이 무척 짠했다.

지난 토요일(24.4.15), 고척돔에서 키움과의 경기를 봤다. 스코어는 1:8. 아쉽게도 롯데가 1이다. 집에 가려고 나오는데 고척 돔 앞다리 난간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다. 아래를 보니 자이언츠 버스가 보인다. 

“나 선수들 좀 보고 갈래.”

남편은 선수들이 나오려면 30분도 더 기다려야 한다며 입을 삐쭉댔지만, 다행히 선수들은 금방 나왔다. 선수들이 나올 때마다 팬들이 “꺄악”하는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웅성웅성하는 와중에 어떤 남자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야구 좀 잘해라!”

순간 정적이 흘렀다.      



지금 가장 속상한 사람들은 선수들 일 텐데. 선수들이 짠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화를 낸 사람도 이해가 된다. 그 사람이 그렇게 화가 난 이유는 아마도 ‘희망’ 때문일 거다. 아, 이번에 되겠다! 싶었는데 안 된 게 많아서 실망감이 차곡차곡 쌓였겠지.    


  

일요일(24.4.14) 경기에도 여전히 잔루가 많다. 아쉽게 이닝이 바뀐다. 난 열심히 긍정 회로를 돌린다.

“그래도 출루는 하네.”

홈으로 들어오려면 우선 출루가 필수다. 그러나 출루 후에 집까지 와야 완성이다. 롯데도 나도 잔루를 줄여야 할 때다. 더는 짠한 존재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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