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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이 Feb 27. 2020

수작으로 남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공동경비구역 JSA (2000), 박찬욱 감독




 <공동경비구역 JSA>는 관객으로 하여금 소피 장 (이영애) 소령의 시점에서 영화를 따라가도록 한다. 중립국 감독 위원회의 법무 장교로서 판문점에 파견되는 소피 장은 남성뿐인 군인 사회에 전쟁 발발 이후로 처음 발을 들이는 여성이자 제3국의 혼혈인으로 중심 사건에 끼지 못하고 배제당하는 인물이다. 소피 장이 남북과 제3국에게서 요구받는 것 또한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사건을 처리하는 것, 즉 철저한 중립이다. 그녀 역시 스스로를 중립적인 존재로 여기고 수사를 시작하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드러나는 사실에 따르면 소피 장은 사실 전 인민군 장교의 딸이다. 비록 그녀가 가족사진에서 아버지를 접어 숨기며 그 존재를 지우고 싶어 하고, 중립국 감독 위원회의 입장에서 수사를 진행하길 바란다 해도 결론적으로 소피 장은 태생적으로 중립이 불가능한, 즉 이 사건을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는 인물이다. 단순히 사건의 원만한 종결만을 요구하는 제3국 사람들처럼 무책임하게 진실을 덮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서사적으로 다소 튀는 인물인 그녀의 시점으로 영화를 전개해 나가는 의도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관객은 영화를 보며 자신이 제삼자의 시선으로 이 영화를 바라볼 수 없는 존재임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영화에, 그리고 분단의 현실에 이미 끈끈하게 관련된 존재들이다.


                

영화 중반부에서 왜 삽입되었는지 의문일 정도로 맥락 없는 롤러코스터 씬이 무려 두 번이나 등장하는 것은 소피 장이 진실을 찾아낼 실마리를 찾아내는 순간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바로 다음 씬에서는 무대 장치를 사이에 놓은 채 스크린이 이등분되는데, 인형 탈을 쓴 사람들이 춤을 추는 무대 뒤에 소피 장만이 그녀 본래의 모습으로 서 있다. 무언가를 고민하듯 잠시 서 있던 그녀는 곧 관객의 기대대로 당차게 홀로 진실을 좇아간다. 그 과정에서 성별 또는 계급으로 자신을 찍어 누르려는 남성들에게 기죽는 일도 없다. 전쟁에서 얻은 상처를 으스대려던 오경필 중사 (송강호)를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장면은 다소 노골적임과 동시에 관객에게 쾌감을 준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소피 장이라는 인물을 통해 군대라는 철저한 남성 사회에서 자칫 수동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유일한 여성 인물이 엄밀한 진실의 판단자라는 자신만의 역할을 오롯이, 그리고 충실하게 해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능동적인 여성상은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 등 이후 이어지는 박찬욱 감독의 섬세한 여성 서사 영화의 초석이라 볼 수 있다. ⠀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또 다른 인물로는 이수혁 (이병헌) 과 남성식 (김태우) 이 있다. 이수혁 병장이 삶을 마무리하는 장면을 생각해보면, 그는 다리를 다친 상태에서 무릎을 꿇게 된다. 영화에서는 아픈 몸으로 헌병들을 제압한 뒤 다리가 풀려 주저앉는 듯 묘사되지만 그의 고통스러운 표정은 마치 그가 사죄의 의미로 스스로 무릎을 꿇은 것처럼 보이게도 한다. 그는 하늘을 한 번 바라보고, 혼란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소피 장을 물끄러미 응시한 뒤 자살을 택한다. 이 순간의 그는 매우 복합적인 표정을 보이는데 거기에서 가장 먼저 읽힌 건 무언의 편안함이었다. '이제 알겠죠', 말하는 듯한 그 얼굴은 자신의 기억과는 달랐던, 스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온전한 진실을 그녀에게 맡기고 떠나는 것 같은 느낌을 남긴다. ⠀


    
또한 영화는 의도적으로 남성식 일병이 균열의 시발점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남성식에게 묘한 불안감, 금방이라도 사고를 칠 것만 같은 불안정함을 얹어 그 전까지 문제없이 잘 지내던 세 사람의 관계가 남 병사의 개입으로 인해 틀어지는 것처럼 관객이 느끼게 만들지만, 사실 정작 온전하게 마음을 열었던 건 남 병사다. 남침에 대한 거짓 정보로 인해 소란이 벌어졌을 때 북으로 더 이상 넘어가지 말자는 이수혁에게 그들과의 작별 인사를 고집하던 모습, 마지막 작별에서 진심 어린 선물을 준비하는 모습. 그리고 우정을 저버리고 제게 총구를 겨누었던 정우진 전사 (신하균) 에게 복수심으로 여섯 발이나 난사하는 모습에서 (그것도 이미 정우진이 사망한 뒤에 발포한 것) 그가 지금껏 진심을 전해왔음이 드러난다.


이러한 그의 인간성 때문에 북 초소에서 플래시 라이트로 장난을 걸어오던 장면이 자꾸만 가슴에 남는 듯 싶다. 창문을 닫지도 않고, 얼굴을 구기는 기색 하나 없이 그대로 눈을 감아 빛을 느끼던 남 일병. 눈을 감았을 때의 시야를 미적으로 연출한 것에서 신선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 사귀기를 두려워한다는 그가 처음으로 마음을 여는 순간을 수준 높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탄성을 자아냈다. ⠀



  



마지막으로 영화의 엔딩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중반부 즈음 모자를 주워주는 씬이 처음 등장했을 때 다소 의문스러웠다. 타자기 효과와 함께 내내 표시되던 날짜가 그 씬에서만 없고, 아예 시간의 흐름 처리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이었다. 왜 날짜를 보여주지 않지, 왜 인물을 보여주지 않고 갑자기 지미집 촬영으로 전환했을까, 그리고 모든 의문이 엔딩 씬에서 해소되는 순간 관객은 짜릿한 전율을 느끼게 된다. 어느 유명한 리뷰대로, 그들은 그 사진 속 작은 프레임 한 장에 모두 담길 만큼 그렇게나 가까이 있었다. 동시에 비극을 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멀었다.


타국인은 물론 한국인조차도 그 세대가 아니라면 체감하기 어려운 복잡한 남북의 정서를 함축적으로 끌어모은, 마치 한국적 감성의 결정체 같은 영화였다. 수작은 수작인 이유가 있다고.



#20.01.28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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