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Carol, 2016), 토드 헤인즈 감독
경험이 쌓일수록 사랑한다는 표현의 무게를 체감해가는 듯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애인에게 말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전부였으나 점차 그 대상은 확장되어 이제는 나의 존재와 마음이 닿지 않을 먼 이에게도, 심지어는 인격을 갖지 않는 대상에게까지도 그 표현을 붙이기가 꺼려진다. 여기서 무게라 함은 무언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다해야 할 의무나 책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그 무게는 매일 아침 눈을 뜰 원동력이 되어주곤 한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그 대상이 나를 버릴 때, 혹은 내가 그를 저버릴 때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다.
주로 글을 쓰는 주제인 영화로 예를 들자면, 수많은 영화를 접할수록 '이 작품을 좋아한다'라고 자신 있게 말을 뱉기가 두려워진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읽고 보고 배우며 가치관 역시 매일 걸음을 옮기기에, 어젯밤 인생 영화로 꼽았던 작품이 자고 일어나면 지독히 낙후되고 시대착오적인 졸작처럼 느껴지는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영화계는 매일이 다사다난한 까닭에 그간 최고라 추앙해왔던 감독과 배우가 어느 날 추악한 범죄자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이미 찬사를 늘어놓았던 나 또한 피할 수 없이 어떠한 무게를 지게 된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일종의 방어기제를 깔아두기 시작했다. "그 사람 그런 부분은 좀 괜찮지 않아?" "그 영화가 그래도 연출은 좋은 것 같아." 따위의 어투로 감상을 전하곤 하는 것인데, 그러다 보니 어느덧 나는 사랑한다는 표현을 아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비록 당장 어디 산 정상에라도 올라가 내가 그 작품 무진장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절절한 사랑이 가슴에서 끓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만약 이 모든 가능성을 감수하고라도, 감히 사랑이란 칭어를 붙일 수 있는 영화를 꼽아야 한다면. 그건 아마 이 글에서 다룰 토드 헤인즈 감독의 <캐롤>이 아닐까 싶다. 난 만약 오늘 밤 갑작스레 종교를 갖게 되어 지독한 호모포비아가 되더라도, 혹은 내일 아침 신문에서 토드 헤인즈가 할리우드 최악의 성범죄자 감독에 등극했다는 기사와 맞닥뜨릴지라도 이 영화에 대한 사랑만큼은 철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다만, 그 정도로 애정한다는 소리다. 사랑할 구석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그 구석들을, 다소 맹목적인 이 마음이 생겨난 까닭을 설명해보려 한다.
사랑의 본질에 관한 고민은 나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왔었다. 아마 사춘기를 맞이했던 십 대 중반 즈음부터 쭉 숙제로 떠안고 살아온 듯하다. 나처럼 그 답을 갈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캐롤>은 한 줄기 빛과 같을 테다. 이 영화는 너무도 또렷하게 사랑의 정의를 품고 있다. 또한 그 정의를 풀어나가는 과정 이곳저곳에도 사랑이 박혀있다.
오프닝은 <캐롤>을 좋아한다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 어김없이 언급되는 요소가 아닐까 싶다. 기차 소리가 들리면 카메라가 눈을 뜬다. 보여주는 첫 번째 대상은 바로 관객으로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늬의 반복이다. 창살인가 싶었지만, 알고 보니 그것은 하수구였다.
이목을 끌었던 점은 알고 보니 이 물체가 하수구였다는 것보다는, 그 사실을 드러내던 촬영 방식인 틸트업 기법이었다. 물체의 일부분만을 주시하던 카메라는 줌아웃으로 조금 멀어지는 듯하더니 곧 각도를 꺾어 하수구의 위쪽 끝을 향해 움직인다. 그 대상이 하수구이기 때문에, 화면을 바라보는 이는 마치 바닥을 보다 고개를 드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또한 모양새가 창살 같은 느낌을 풍기는 탓에 그로부터 시선이 벗어남에 따라 묘한 해방감도 얻을 수 있다.
길을 걷는 누구도 시선을 주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불결한 취급을 받는 가장 낮은 곳. 아름다운 장면이 수두룩한 이 영화에서 굳이 하수구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꽤 뚜렷해 보인다. 철저하게 동성애의 존재가 지워졌던 1950년대 미국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두고 동성 연인의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성소수자 감독의 의도이자 다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영화는 가장 낮은 곳을 비출 것이며, 결코 멀어지거나 저버리지 않고 치열하게 따라가겠다고. 또한 두 주인공이 고개를 드는 해방이자 성장의 여정을 다룰 것이라는 암시로도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다. 그리고 그 각오의 바탕에는 두 사람을 잇는 장치이자 장애물을 뚫고 달리는 역동적 이미지를 지닌 기차 소리가 깔려 있다. 이렇듯 의도가 다분한 오프닝에, 나는 과연 얼마나 섬세한 시선을 갖춘 영화일지 잔뜩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하면 영화의 애정 어린 태도가 드러난다. 바로 영화적으로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종종 의도적으로 뜸을 들이는 모습이다. 오프닝을 생각해 보면, 영화는 곧바로 캐롤이나 테레즈를 비추며 그들의 이야기로 접어들도록 두지 않았다. 카메라가 가장 처음으로 포커스를 두는 인물은 한 남자이다. 처음으로 등장한 인물이기에 관객은 자연스레 그의 정체를 궁금해하지만, 곧 그가 별 비중이 없는 행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남자의 뒤를 졸졸 따라가던 카메라가 뒤늦게 진짜 주인공에게 도달하면, 관객의 의식 역시 캐롤과 테레즈에게로 자연스럽게 옮겨간다.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 점차 무르익을 무렵 그녀들은 서부로 훌쩍 떠난다. 여행은 불안과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한 캐롤 탓에 테레즈도 관객도 온전히 마음을 놓고 즐길 수는 없던 대체적으로 도피에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티 없이 행복한 순간도 분명 있었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할인을 핑계 삼아 처음으로 한 방에서 묵게 된 두 사람이 화장 놀이를 할 때, 숏이 전환되는 방식이다. 카메라는 오프닝과 마찬가지로 관객의 청각만 열어둔 뒤 방 안의 이곳저곳을 비추며 아주 천천히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카메라가 마침내 두 사람에게 닿았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무려 30초로, 그동안 우리에게는 오로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만 들릴 뿐이다. 관객이 궁금해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영화는 일부러 행복에 찬 두 사람의 얼굴을 곧바로 잡아내지 않는데, 이 모든 의도적인 지연은 유사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느껴진다. 뜸을 들인다는 건, 일종의 사랑의 표현이다.
테레즈가 차에서 내려 카메라로 캐롤을 찍는 장면은 원작에 없는 설정을 넣어가며 감독이 만들어낸 씬인데, 이 씬이 바로 그 의도적 지연을 시각화해낸 결과물인 셈이다. 즉시 찍지 않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카메라를 쥔 채 숨을 참으며 몇 초를 기다리는 것. 나는 러닝타임 내내 영화가 이 장면에서의 테레즈와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느꼈다.
"I love you"라는 대사에 도달하는 여정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 멜로 영화에서, 캐롤과 테레즈는 영화가 끝나기 10분 전에야 그 대사를 등장시킨다. 그것도 동거 제안을 거절당한 뒤 이 순간이 마지막일 수 있겠다고 직감한 뒤에야 마치 오랫동안 참았던 숨을 토하듯 간절하게 내뱉는다. 오가는 눈빛은 얼마나 절절한지 마치 시공간이 멈춘 듯하다. 마지막이라 생각되는 순간까지 차마 말하지 못하고 끌어온 그 말의 무게는, 앞서 리처드와 하지가 두 사람을 옭아매려 너무도 쉽게 뱉었던 말과 자연스레 대비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뜸을 들일 수밖에, 못내 끙끙 앓으며 묵혀둘 수밖에 없다. 쉽고 빠르게 말할 수도, 또 담아낼 수도 없는 것이다. 카메라는 그 사랑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지기 위해 여러 번 관객을 기다리게 만든다. 이렇듯 이 영화에는 두 인물을 대하는 방식 자체에서부터 사랑이 깃들어있는 것이다.
눈길을 사로잡았던 또 다른 것은 영화가 두 여성의 해방을 강조하던 방식이다. 서로와 떨어져 있는 각자의 삶에서의 그녀들을 비출 때, 영화는 대부분 이차 프레임을 거쳐 그녀들을 담아냈다. 실물 대신 거울이나 유리창에 비춘 형상을 담아내거나, 진열대의 유리창 혹은 사무실의 유리 벽 등 또 다른 프레임을 만들어 그 안에 가두었다. 그녀들이 의지와 상관없이 각각 방문해야 했던 파티장에서의 모습 역시 예시로 들 수 있을 것이다(사진 참고). 인물들은 프레임의 끄트머리에 위태롭게 몰린 채 위치해있다. 이러한 이차적인 프레임은 현실의 압박에 의해 원하는 곳에 있지 못하고 갇혀있는 그녀들의 현실을 시각화하고, 본인의 자아를 잃은 존재론적 상태를 부각시킨다.
따라서 이와 자연스럽게 대비되며 관객의 이목을 끄는 것은 엔딩 씬이다. 캐롤이 있던 식당에 테레즈가 뒤늦게 도착하고 끝내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다. 마치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이 시퀀스는 인물의 시점샷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방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온갖 프레임 속에 갇혀있던 두 사람은 마침내 어느 것에도 담기지 않은 채 오롯이 존재한다. 그간 카메라 뷰 파인더로, 또 차창 유리 너머로 서로를 바라보던 그녀들은 더 이상 거칠 것 없이 두 눈으로 직접 서로를 응시한다.
인물들이 이루는 위치 상의 구조에도 주목해야 한다. 첫 만남에서 먼저 캐롤을 발견하고도 자리를 지켜야 했던 테레즈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캐롤을 향해 직접 걸어간다. 항상 테레즈를 차로 데리러 오가며 그들이 있을 장소를 결정하던 캐롤은 꼼짝없이 앉은 채로 테레즈의 눈길을 받아낼 뿐이다.
이러한 관계성의 전복과 이차 프레임의 제거는 테레즈라는 인물의 성장과 억압받던 두 사람의 해방을 강조하여 드러낸다. 엔딩 시퀀스에는 어떠한 대사도 없지만 영화 속에서 차기 대통령이 취임하여 국면이 바뀌었듯 두 사람에게도 새로운 세상이 열렸음을 관객은 충분히 체감할 수 있다. 눈빛과 음악, 연출을 통해 서사의 절정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이 방식은 오히려 더욱 깊은 여운을 남긴다.
영화 이곳저곳에 깃들어 있는 사랑을 탐구하다 보면, 본질적인 질문에 도착한다. 그렇다면 두 인물을 통해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왜 제목이 테레즈가 아닌 캐롤일까?' 라는 질문과 연관이 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시간적으로 먼저 등장한 테레즈에게 이입할 가능성이 높을 텐데 어째서 타이틀은 캐롤이 차지했을까. 그건 이 영화가 말하는 사랑의 정의를 더욱 잘 비추어 낸 인물이 캐롤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캐롤>이 말하는 사랑이란 나를 더욱 빛나는 곳에 데려가 주는 것도 아니고, 지금껏 알지 못했던 나 자신에 새로이 정착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온다'라는 캐롤의 편지와 같이, 이 영화가 말하는 사랑은 나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을 말한다. 사랑하는 이를 통해 사람은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게 된다. 캐롤이 테레즈를 통해 그랬듯, 테레즈가 캐롤을 통해 그랬듯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지다. 불가항력의 썰물에 의해 원래의 자리에 피동적으로 밀려오는 게 아니다. 직접 걸어와야 하고, 그 걸음을 옮길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불어넣는 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사랑이다.
I took what you gave willingly.
"난 내 의지로 당신을 받아들였어요."로 직역되던 이 대사는 이번 개봉에서 번역이 수정되었다. "당신은 자유의지로 내게 온 거예요."
여행을 떠나 테레즈와 함께하는 순간에도 딸 린디의 존재는 끊임없이 캐롤을 괴롭힌다. 그녀의 집에 걸려있던 어린 테레즈의 모습은 린디를 떠오르게 하고, "아이들 없는 연말은 상상할 수 없다"라는 라디오의 멘트는 그녀를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몰아넣는다. 그렇게 복합적인 감정에 시달리던 캐롤은 결국 본인의 자리로 돌아올 것을 결정하고 사랑의 도피를 끝낸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회귀라는 건 그녀의 생각보다 더욱 멀리 있었다. 테레즈와 결별한 뒤 동성애라는 병명으로 치료를 받던 캐롤은 그간 화려한 빛깔을 자랑하던 옷과 손톱에서 모두 색을 잃었다. 그리고 영화 내내 그녀를 상징하던 그 붉은색은, 차창 너머로 우연히 재회한 테레즈에게로 옮겨가 있었다.
잃었던 본인의 색을 마주하고 난 뒤, 결말에서의 그녀는 결국 다른 여성을 사랑하고 있는 퀴어로서의 자신을 부정하지 않기로 선택하고 그토록 집착하던 아이의 양육권을 스스로 포기한다. 엄마라는 무게를 딛고 일어서 스스로의 정체성, 즉 자신이 있을 자리를 지키는 편을 택한 것이다.
언젠가 애비가 말한다. 테레즈는 너무 어려서 이게 뭘 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캐롤은 그 말에 동의하며 자신 역시 모른다고 답하지만, 실은 그녀는 알고 있었다. 테레즈와는 달리 이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한 번 겪어 보았으니 오히려 처음인 테레즈보다 덜 무섭고 덜 혼란스럽지 않냐며 반문할 수 있겠지만, 동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정신적 치료를 강요당하던 그 시대의 성소수자는에게는 사정이 다르다. 캐롤은 애비와의 일이 부부 관계와 본인의 삶에서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이미 겪어보았기에, 본인의 선택으로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최종적으로 내린, ‘진짜 회귀’ 를 향한 결정은 더욱 빛이 난다.
물론 캐롤에게서 더 두드러졌을 뿐, 테레즈 역시 영화가 말하는 사랑의 정의에 착실하게 따른 인물이다. 점심 메뉴조차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던 테레즈가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여행을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받아들이고, 그간 질질 끌어오던 리처드와의 결혼을 단칼에 정리하는 모습은 모두 그녀가 스스로 내린 결정이다.
그 결정의 바탕으로는 캐롤에게 달려가기 직전 머물렀던 파티장에서의 공허한 시간이 있었다. 다들 완벽하게 제자리를 찾은 것만 같은 사람들, 테레즈는 그 곁을 겉돌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목도한다. 새해뿐만이 아닌, 남은 평생을 이 순간처럼 수많은 사람 속에서 혼자 보내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 것이다. 캐롤의 옆,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지금 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따라서 마지막 장면에서의 두 사람은 마치 "이제야 내 자리에 왔다”고 말하는 듯한 은은한 미소를 교환한다. 그 미소는 두 사람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짙은 여운과 안정감을 남긴다.
흔히들 ‘사랑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사랑의 힘 덕분에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다고. 그러나 이는 바꾸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 그 어려운 일을 해냈기에, 바탕이 되었던 감정을 훗날 사랑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이라고. 영화에 삽입되었던 Eddie Fisher의 가사처럼, 기회를 잡았기에 그것은 사랑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누군가 나에게 이 영화를 왜 사랑하냐 묻는다면, 그건 바로 이 영화에 '왜 사랑을 하냐'라는 질문의 답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다. 캐롤과 테레즈가 서로를 통해 본인이 있어야 할 곳으로 회귀했듯,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만든다는 점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자체적인 의의를 갖는다. 이 영화는 그 어느 작품보다도 나의 자리를 지키며 살고 싶도록 만들기 때문에, 꼭 나로 살겠다는 다짐을 이끈다는 점에서 나는 지금껏 <캐롤>을 사랑해왔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거창한 이유를 들어 설명할 필요는 딱히 없을 것이다. 난 그저 대화를 이어가다 마치 무의식적으로 잡은 척 은근슬쩍 쥐었다 놓는 손을 좋아할 뿐이다. 흔들리는 카메라에 불규칙적으로 줌을 당기며 재현해낸 누군가를 훔쳐보는 눈길을, 그리고 그 시선을 받는 피사체가 되었던 눈, 입술, 팔뚝을 좋아한다. 듣는 이의 가슴을 들었다 놓을 만큼 대담하게 오가던 플러팅을 좋아하고, 애써 태연한 척 받아쳐보지만 미처 숨겨지지 않은 긴장에 꼴깍 넘어가던 그 목울대를 좋아한다. 눈에 담고 싶은 그 모습을 놓칠세라 급히 카메라에 필름을 집어넣는 다급한 손가락도 좋아한다.
이것들만 모아보아도 사랑인데, 이렇게 많은 곳에 여기저기 묻어있는데. 그것을 추구하며 찾아 헤매는 이로서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녀들의 모든 순간이 사랑 그 자체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