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파(逆傳播), 오차 역전파법(영어: Backpropagation 백프로퍼게이션) 또는 오류 역전파 알고리즘은 다층 퍼셉트론 학습에 사용되는 통계적 기법을 의미한다. - 위키백과
"괜찮아요?"
나를 깨운 목소리엔 이 위협적인 손님을 어떻게 진정해야 하나, 하는 머뭇거림이 담겨있었다. 손가락은 거칠어진 전화기를 내려치듯 붙잡고 있었고, 우둘투둘한 감촉이 느껴지는 것이 이미 몇 번 내려친 것 같았다.
"손님, 지갑을 못 찾으시겠나요?"
일단 택시에서 내려 희끄무레 해진 기억을 헤집어 보든 말든 하려면 카드가 있어야 한다. 억눌러둔 어떤 부분에서 튀어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짜증을 담아 전화기를 던지고 두 손으로 지갑을 찾아봐도 영 어디에 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저씨, 지갑을 못 찾겠네요."
라고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귀에 들리는 소리는 영 아닌 것 같다. 힐끗 본 아저씨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니 전달은 잘 됐나 보다.
"아저씨, 어떡하죠?"
가방을 뒤지는 손 끝에 잡히는 건 길 가다 받게 된 전단지였다. 내가 매직을 들고 다녔던가?
"아저씨 여기에 계좌번호 좀 써주세요, 내일 꼭 보내드릴게요."
똥 밟았다는 반응과 얼굴이었지만 어떻게든 계좌번호를 받기는 했다. 갑작스레 돌변해 달려들 까 봐 겁이 난 상대 앞에서는 죄스럽고 고통스러운 생각 외에는 들지 않았다. 간신히 기어 나온 차는 떠나고, 부서진 전화기를 주워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두어 번 정도 바닥에 내려쳐 확실히 끝장내버렸다. 액정 뒤 지문 인식 영역 위치는 비어 있구나, 새로운 사실도 하나 알고는 잠이 들었다.
대화는 언제나 각각의 균형점에서 이뤄진다.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이뤄지는 대화는 그 균형감에 경이로움마저 느껴지기 마련이다.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씩 사뿐사뿐 놓아지는 언어, 그들의 관계가 쌓이고 평형에 이르기까지. 가끔 사랑은 대화의 한 종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내가 지독하게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어로 이뤄지는 대화일 것이다. 맥락을 모두 깨닫지는 못하겠지만 어떤 단어들이 오가는지, 흐름이 대강 어떠한지만 이해하겠지. 내가 읊조려온 그 모든 언어는 절묘하게 균형을 벗어나기만 했다. 마치 정교히 설계된 오역인 것처럼. 그렇게 비껴 간 편지 중에는 가끔 기억에 남는 것들이 있었고, 사무칠 이야기는 두 명이 있었다. 그리고 지우지 못할 문장이 한 줄 남았다. 들어줄 사람은 없으니 그 말은 영원히 내가 간직하게 될 뿐이었다. 무엇보다 이제 네 이름을 불러도 들리지 않을 터였다.
당시의 나는 이미 한번 죽어있는 상태였다. 사실 그걸 죽었다고 말하려면 몇 번의 죽음을 이미 겪은 상태였다고 말해야겠지. 죽음의 이유는 다양했다. 한 번은 학교에도 없는 두발 규정에 치욕스럽게 이발을 했었던, 보다 여리던 시절의 사건이었고. 두 번은 비슷한 시기에 겪어 내야 했던 가장의 고뇌를 받아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몇 번의 죽음을 겪고, 하루를 어떻게든 살아내던 내 삶을 바꾸겠다며 추천받은 자리였다. 면접을 보러 간 날, 숙취에 벗어나지도 못한 채로 독하게 향수만 뒤집어쓰고 겨우 다녀왔건 만 어찌 된 영문인지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땐 글쎄, 밝았다. 네 얼굴은 다른 풍경보다는 조금 더 밝았던 것 같다. 부시기만 하는 게 아니라 눈에 스며드는 그런 빛처럼. 원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에 약하기는 해서 그렇게 확신을 가지지는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너에게는 조금 명확하게 보였나 보다. 내가 너를 보는 시선이 반짝이는 걸. 뒤척이다 눈을 뜨니 별안간 어두컴컴한 세상이다. 이런 어둠 속에서는 그런 빛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십 년이 지나고도 너는 내 기억의 마지막 빛이구나 하며 몸을 일으킨다. 그래, 이 기억을 물로 조금 털어내면 잠이라도 자겠지 싶어 이불 밖으로 발을 딛는다. 몇 번의 휘청임이 이어지고 드디어 불을 밝히자 거울 앞이다. 물이 흐르는 막간을 틈타 이제는 추억보다 더 괴로운 기억이 떠오른다.
강동에서 마포로 이사 오고 좋은 점은 학교가 가깝다는 점이다. 한 세 번 정도 걸어서 학교를 갔다 오면 이렇게 한 번쯤은 편하게 집에 갈 수 있는 면죄부가 쥐어진다.
"염리동 상록아파트로 가주세요."
솔직히 뭐라고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군말 없이 차는 움직인다. 위스키를 몇 잔일지 모르게 걸친 상태였다. 괴로운 시간과 오랜만에 만난 고교 동창들이 반가워서였을까. 무엇이든 툭 터 놓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친구들이라 해도 적당한 불편감은 있어야 했나 보다. 마신 술이 부글거리고 야릇한 용기가 피어오른다. 그런 용기가 부추기는 것은 여지없이 너에 대한 생각일 뿐이다. 네 번호도 저장되어 있는데 못할게 무어냐는 착각이 든다. 세상엔 못할 일이 참으로 많기도 했다.
"..."
희끄무레한 정신 속에도 좌절감과 슬픔, 일종의 부끄러움과 고통스러운 감정, 착각이 무너진 후유증은 잘만 느껴졌다. 잠들어 버린 내 이성도 들끓는 감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듣던 음악이 지지직거리는 소리도 짜증만 돋울 뿐이다.
육칠 년 전쯤에 나는 한참 동안 너에게 고통이었다. 내가 너에게 해주는 것 이라곤 그저 뻔하디 뻔한 수작으로 죄악을 치대는 것뿐이었다. 너는 한사코 나를 무시했지만 나는 자포자기한 사람 치고는 상당히 집요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너는 나를 볼 가능성에서 점차 멀어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 집요함의 기저엔 물론 당시에는 끈기라고 여겼던 내 성향이 있었지만, 그런 나를 합리화하는 것은 결국 네가 내게 남긴 한 줌의 빛이었다. 아마 그 빛을 일부러 남긴 것은 아닐 것이었다. 너는 이상하게도 나를 잘 아는 것 같았다. 내 망상을 어떻게 하면 건드릴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내 착각이 네 눈빛에서 아련함을 느낄지 잘 아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자리가 바뀌는 날이면 제발 너와는 같이하지 않기를 그렇게도 빌었다. 그 빛이 내게 스며들기를 그렇게도 거부했지만 이미 스며든 얼룩이 빠질 일이 있겠나. 꼬박꼬박 향수를 뿌리고 나섰던 아침의 공기에는 숨죽여 웅크린 기대도 섞여 있었다. 이 향은 지난번 내가 죽었을 때도 피어오르던 향이었으니 당연하기도 했다. 그렇게도 꾸밀 줄 모르고 투박하게 살던 내가 샤넬을 뿌리고 다닌 건 이제 와서 보면 재밌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런 기대는 저녁때쯤 엔 망상으로 남아 빈 속에 채워지곤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기는 무슨, 그냥 하룻밤 헛된 꿈자리를 빌려오기만 해도 다행인 나날이었다.
눈을 뜨고 가장 먼저 찾은 것은 계좌번호가 적힌 전단이었다. 솔직히 가방 안에는 대충 구겨진 쓰레기만이 남아 있기를 바랐다. 너무나도 구체적인 악몽이라 도저히 믿고 싶지는 않았다. 계좌번호가 적힌 전단지를 들고 우선 ATM을 찾았다.
"입금하시는 분(송금인)의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시고, [확인]을 누르십시오."
돈은 죄송한 마음과 함께 넉넉히 보냈다. 죄 없이는 살지 못하는 삶인가 싶어 잠시 묵념도 했다. 이제 테니스장까지 걸어가 박살난 전화를 찾아오면 되는 일이었다. 아니 정말로 되는 일 일까.
너는 어느새 내가 그은 영역 안에 들어와 있었다. 한 번은 너의 시선을 피해 내 무리 속으로 숨어들기도 했고, 그러면서 네가 들을 수 있도록 내 감상평도 흘리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어떻게 이끌려 따라간 빵집에서 어렴풋이 상상만 했던 이야기를 들을 때는 도저히 덜덜 떨지 않고는 버티기 힘들더라. 언젠가 한 잔 씩 마시며 내가 했던 말에 네가 덜덜 떨었던 것처럼 느껴진 것은 분명한 착각이었을 것이며, 당연히 너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지독한 거짓말이다. 시급한 네 요청에 위트 있는 척 장난으로 겨우 흘려보내던 내게 사실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당시의 너를 좋아한다는 것은 비참한 패배처럼 여겨졌다. 결코 승리할 수 없는 싸움을 무모하게 걸어내고 착각과 망상이 풀어져 싸늘하게 식어가는 그런 모습이 내가 되지 않을까 했다. 책도 읽는 지적인 모습을 올린 단순한 사진 속 글귀가 내게 하는 말처럼 느껴지던 때, 이미 그런 패배는 정해진 결말이었음에도 고집 하나는 확실했다. 그런 마음을 감추기가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는 사실에는 집요함도 끈기도 무엇도 맞서지 못했다. 함락된 감정 뒤에는 망상을 담아 노래를 올리거나, 별로 보고 싶지 않을 내 소식을 적어 보내는 나날이 이어졌다. 당연하게도 네가 듣는 노래는 가사 한 줄까지도 집요하게 뜯어볼 따름이었다. 이런 관음증을 너도 같이 앓기를 하는 생각도 있었을 테다. SNS라는 건 결국 관음증 환자들을 수용하는 시대의 해법이 아닌가 하며. 십 년이나 묵은 이 고백을 털어놓고 나니 결론은 한 가지였다. 네 사랑을 당당히 얻어내는 과거는 불가능해도, 지난날의 진흙은 없던 것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과거가 우리의 현재를 결정한다면 현재는 과거의 나를 이미 정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따분한 영상이었지만, 오늘따라 더 길게만 느껴졌다.
"Backpropagation은 오차 역전파라고 하죠, 오차 역전파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내가 정의하는 현재 값과 모델이 결정한 결과, 과거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그 차이를 어떻게 지나온 레이어에서 줄여줄 수 있을지를..."
그러나 영상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귀를 틀어막은 헤드셋을 치우면 어떤 불행이 그 공허를 채울지 두려웠다. 다만 이 따분한 강의가 어서 약속 시간으로 나를 보내주기만 바랄 뿐이었다. 동창들을 만나면 그래도 숨을 쉴 수 있을 테였다.
우리가 사는 시간선이 그래프로 나타나질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삼 년 전쯤엔가 수학적으로 증명된 바가 있다. 우리는 각자 스스로 살아온 시간선 그래프로 정의된다. 나라는 인격을 형성한 삶의 대사건들이 얇은 거미줄로 이어진 모델의 끝 단이 내가 살아가는 현재인 것이다. 한 낱 인간이 같은 사람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증명하느냐고 한다면 당연하게도 데이터 센터가 남아 돌아서 오히려 이산화탄소 배출로 인한 지구 환경 영향을 걱정해야 하는 돈 많은 기업이 병렬로 연결한 주문형 반도체에 수억 달러를 쏟아부은 결과물이라고 밖에는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 증명의 가설을 수립하고 계산을 수행한 것조차 컴퓨테이셔널 그래프로 정의된다는 것은 역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진리다. 물론 클라우드에 기생하는 그래프와 시간선 속에 웅크린 두 그래프가 말하는 수학은 완전히 다른 무엇이다. 플랑크 시간이라는 최소 단위에 얽매인 주제에 연속성 따위를 논하다니 웃기지도 않을 따름이다.
마포에서 성동으로 이사 오고 좋은 점은 학교가 가깝다는 점이다. 한 세 번 정도 걸어서 학교를 갔다 오면 이렇게 한 번쯤은 편하게 집에 갈 수 있는 면죄부가 쥐어진다.
"사근동 벽산아파트로 가주세요."
솔직히 뭐라고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군말 없이 차는 움직인다. 위스키를 몇 잔일지 모르게 걸친 상태였다. 괴로운 시간과 오랜만에 만난 고교 동창들이 반가워서였을까. 무엇이든 툭 터 놓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친구들이라 해도 적당한 불편감은 있어야 했나 보다. 마신 술이 부글거리고 숨겨둔 분노가 피어오른다. 그런 분노가 부추기는 것은 여지없이 단순한 짜증일 뿐이다. 어차피 비싸지도 않은 전화에 이어폰인데 못할게 무어냐는 착각이 든다.
잠들어 버린 내 이성은 들끓는 감정이 무슨 일을 벌일 것인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다만 듣던 음악이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짜증이 나 참지를 못할 뿐이다. 전화기 보험료도 꼬박꼬박 잘 내고 있는데 이 정도 분노는 합리적이지 않을까.
현재 나의 정의에서 한심하기 짝이 없는...으로 시작하는 부분을 지웠다. 결과는 칠 년 전에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복잡한 그래프 상에서 이 손실 값이 만들어내는 그래디언트가 겹치고 겹치다 보면 어떤 과거를 낳을지 내가 알아낼 방법은 없지 않은가. 다만 네 삶이 내가 쏟아내는 죄악으로 더럽혀지지 않고 사랑으로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일 뿐이다.
"괜찮아요?"
나를 깨운 목소리엔 이 위협적인 손님을 어떻게 진정해야 하나, 하는 머뭇거림이 담겨있었다. 손가락은 거칠어진 전화기를 내려치듯 붙잡고 있었고, 우둘투둘한 감촉이 느껴지는 것이 이미 몇 번 내려친 것 같았다.
"손님, 지갑을 못 찾으시겠나요?"
일단 택시에서 내려 희끄무레 해진 기억을 헤집어 보든 말든 하려면 카드가 있어야 한다. 억눌러둔 어떤 부분에서 튀어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짜증을 담아 전화기를 던지고 두 손으로 지갑을 찾아봐도 영 어디에 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저씨, 카드를 못 찾겠네요."
라고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귀에 들리는 소리는 영 아닌 것 같다. 힐끗 본 아저씨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니 전달은 잘 됐나 보다.
"하... 손님, 그냥 내려서 집에 가세요."
가방을 뒤지는 손 끝에 잡히는 건 한창 읽고 있던 논문이었다. 내가 연필을 들고 다녔던가?
"아저씨 여기에 계좌번호 좀 써주세요, 내일 꼭 보내드릴게요."
똥 밟았다는 반응과 얼굴이었지만 어떻게든 계좌번호를 받기는 했다. 갑작스레 돌변해 달려들 까 봐 겁이 난 상대 앞에서는 죄스럽고 고통스러운 생각 외에는 들지 않았다. 간신히 기어 나온 차는 떠나고, 부서진 전화기를 주워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두어 번 정도 바닥에 내려쳐 확실히 끝장내버렸다. 액정 뒤 지문 인식 영역 위치는 비어 있구나, 새로운 사실도 하나 알고는 잠이 들었다.
어차피 최적화 방향은 명확하다. 최대한 내가 배제되는 방향으로 손실 함수를 정의해야겠지. 내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 시간선 그래프라는 사실에 감사한다. 나의 시대는 지나가고 다음 시대가 또다시 정의된 손실 함수에 의해 조정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정확도 높은 모델이 완성되겠지. 이 조그만 계의 변화를 위해 빠르게 증가할 온 우주의 엔트로피에 미안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구원받아야 할 것은 구원받아 마땅하다. 나의 구원에는 너무 많은 대가가 필요했다. 시간 역설의 해결과 네 운명론적 희생 그리고 양심을 넘어선 용기까지. 그러니 나는 더 이상의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낫겠다. 다만 네가 내 시간선 속에 여전히 남아주길 바랄 뿐이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알람은 왜 울리지 않았을까? 어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전화는 보이지 않고 계좌가 적힌 논문이 하나 방바닥에 뒹굴까? 순간 전화가 테니스장 풀밭으로 떨어져 결국 찾지 못했던 새벽의 기억이 한 조각 떠올랐다. 오늘 하루는 조금 길게 느껴질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