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과 무관심의 상관관계
무관심은 익숙함 탓이라 생각했다. 한 때 그토록 원했던 무언가를 지니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익숙함이라는 그림자가 위에 드리워져서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상태가 찾아온다. 언제나 나의 무관심은 그것이 익숙함에 이유가 있는 것이라 애써 정당화하곤 했다.
내가 살던 예전의 부산은 좀처럼 눈이 내리지 않는 곳이었다. 겨울이면 간간히 진눈깨비가 날리긴 했었지만 눈이 쌓였던 기억은 거의 없는 곳. 19살이 지나 그곳을 떠날 때까지 내게 겨울은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늘어선 거리의 모습이었다. 겨울이 찾아와 하얗게 눈이 쌓인 길거리를 걷는 것은 영화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설레는 일이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고3의 겨울, 논술 시험을 치기 위해 찾았던 서울의 한 대학가에서 눈 덮인 거리를 한참 걸었던 기억이 있다.
대학 입학만큼이나 흰 눈에 대한 기대가 컸던 때 가 있었고, 눈으로 덮인 길거리를 우산 없이 걸어 다니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것들 중 하나는 익숙함이 가져오는 무관심이다. 바라고 바라던 것들은 내 곁에서 머무는 시간과 비례해서 처음의 생기를 잃어가곤 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관심 없는 눈으로 바라보면 아무런 설렘을 주지 않게 되는 것들. 익숙하니까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관심을 주지 않게 되는 것들이 늘어감에 따라, 내 삶에서 두근거림을 주는 것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어갔다.
부산에서 살았던 것만큼이나 오랜 시간을, 매년 눈이 쌓이는 곳에 살게 된 지금 나는 눈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다. 더 이상 내리는 눈을 맞으러 나가지 않게 되었고, 행여나 나갈 일이 있으면 꼭 우산을 쓴다. 우산 위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버리며 질퍽질퍽 땅을 보고 걸어간다.
교직에 들어선 지 어느덧 10년 차, 한 때 나는 내가 가르치는 모든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교사였다. 학교라는 곳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라 어리숙할 때 아이들은 매일의 즐거움이었고, 하나 같이 개성 강한 그들은 언제나 가슴 뛰는 설렘을 내게 줬다. 설렘은 곧 관심이 되어 나는 모든 아이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던 때가 있었다.
<선생님 제 이름 아세요?>
<음, 당연히 알지.>
<뭐예요?>
<아, 근데 내가 지금 진짜 바쁜 일이 있어서... 미안 나중에 이야기하자.>
며칠 전 복도에서 마주친 아이가 물었다. 사실 복도 끝과 끝에서 그 아이와 눈을 마주쳤을 때부터 불편한 예감이 들긴 했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눈으로 이야기하며 걸어오는 아이와 가까워질수록, ‘쟤는 누구지?’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아니나 다를까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아는지 물어왔고 나는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복도를 지나 황급하게 계단을 뛰어내려 가다 번뜩 이름이 생각이 났다.
‘다시 올라갈까? 아직 거기에 있겠지?’
얼른 방향을 틀어 두 계단씩 성큼성큼 올라갔다.
<너 oo 이잖아.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알았냐. 하하.>
<헐. 저 걔 아닌데요.>
언제부터인가 쉽게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아이들과의 만남이 잦아지고 있다. 분명 교직 초기에는 애써 외우려 하지 않아도 기억했던 이름들이 이제는 노력을 함에도 불구하고 입에 달라붙지 않는 것이다. 여전히 개성 넘치는 각각의 아이들은 내 머릿속에 몇 반 아이들, 또는 oo선생님 반 아이들로 퉁쳐지고 색이 바래 있다. 아무래도 200명이 넘는 아이들 이름을 기억하는 건 무리가 있다 라고 변명을 해보지만, 그 변명은 되려 몇 년 전의 나로 인해 모순이 돼버린다.
너무 익숙함에 빠져 무관심해져 버린 걸까. 눈을 좋아했던 20대 초반의 나는 내리는 눈을 보면 짜증이 나는 30대 후반이 되었다. 이름을 기억하던 20대 후반의 교사는 이러다 아이들 얼굴만 봐도 지쳐버리는 씁쓸한 모습의 교사가 되는 것은 아닐까.
오늘 아침 커튼을 걷고 밖을 보니 흰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내리는 눈을 맞으러 일부러 나가 주변을 걸어 본다. 살얼음이 살짝 낀 길을 밟을 때 나는 소리가 새롭고, 무겁지 않게 머리에 내려앉는 눈의 촉감도 느껴본다. 나무에도 자동차에도 눈이 내려앉는 모양을 자세히 보니 저마다 다른 알갱이들이 반짝거린다. 오늘 내린 눈은 내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그것이 아니었다. 관심을 두니 내가 생각했던 익숙함은 날리는 눈발처럼 흩어져갔다.
익숙하기 때문에 무관심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하기 때문에 익숙하다고 치부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시간을 핑계로 익숙함을 방패로 아이들과 멀어져 왔던 건 아닐까.
12월이 지나가는 지금, 늦었지만 아이들의 이름을 외워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