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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감한맘 Jun 15. 2023

소개팅 온도 영하 18도


2005년 1월 8일 오후 2시 소개팅

2005년 1월 9일 오전 6시 48분 태백산 정상(영하 18도)


누구와?

소개팅남 & 그의 친구들


—————————-

오랜만에 소개팅이라 한껏 치장을 하고 정독도서관 근처 카페로 향했다. 멀리서 걸어오는 남자가 소개팅남이 아니길 바랐지만 영화 속 주인공은 영화 속에만 나오는 걸로...


얼른 저녁만 먹고 헤어지려 했다. 어색해질 무렵 우리를 소개해준 주선자 커플이 왔고 우리는 저녁을 함께 먹었다. 그렇게 밥을 먹으며 이 자리를 어떻게 빨리 정리할지 여러 가지 대안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할까?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할까?

대장금 드라마를 보러 가야 한다고 할까? (이건 내가 다른 소개팅에서 그 남자에게 차인 이유 TT;;)


그렇게 머리에 수많은 생각들이 올라오는데 갑자기 창밖에 눈이 내린다. 하얀 함박눈이다. 나는 그 해 눈 오는 태백산을 가기로 결심했고, 결심을 실행하기 위한 첫 번째 선택은 쇼핑이었다. 지난주에 주문한 겨울 등산복과 등산장비가 도착했고 당장이라도 떠날 것 같던 의욕은 택배 도착과 함께 사그라져 비닐도 뜯지 않은 채 내 방 침대 밑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태백산 가야 하는데 눈꽃이 하얗게 핀 그곳을..., 어느새 소개팅은 사라지고 태백산만 눈앞에 아른 거렸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소개팅남이 오늘밤 친구들이랑 밤 12시에 모여서 태백산에 가기로 했다고 나에게 빈말로. 아주 가볍게. 예의상. "같이 가실래요?"라고 물었고,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네!!!!!”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렇게 소개팅남이 당황할 여유도 없이 소개팅 주선자 커플까지 영하 18도의 날씨에 태백산을 끌려가게 되었다. 


우리는 저녁 식사를 급히 마무리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 등산 갈 준비를 하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것도 새벽 한 시에! 그래야 차로 이동하고 도착해서 올라가면 일출을 볼 수 있기에 그 시간에 모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삼대가 복을 받아야 볼 수 있다는 태백산 일출(지리산 백록담 모두 같은 전설?)을 그 소개팅남과 봤다. (참고로 눈은 서울에만 왔다는 거 TT;;)


머리카락과 목도리에 서리 낀 노숙자 스타일의 소개팅녀

그렇게 꽁꽁 언 우리는 하산하며 근처 닭도리탕 집에 들렀다. 하필이면 신발 벗고 들어가야 하는 방이 뜨끈뜨끈한 좌식 식당이었다. 아침을 먹고 한 명 두 명 절절 끓는 식당 바닥에 눕기 시작했다. 


소개팅남이 잠시 눈을 붙이라고 깨워 준다고 했으나 아니라고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저기요~~~ 저기요~~~”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내가 꿈을 꾸는 건가?? 이건 무슨 소리지??? 눈을 떠보니 그 큰 식당에 나 혼자 대자로 뻗어서 자고 있었다. 


차마 소개팅남과 친구들은 나를 깨우지 못하고 다 차로 갔고 기다리다 기다리다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서울 가는 길이 막힐까 봐 나를 깨우러 들어왔다. 


망신 망신 개~망신


그렇게 난 일 년 뒤 그 소개팅남과 결혼했고 지리산 한라산 설악산 소백산 외에도 제주도 오름이란 오름은 모두 돌아다녔다. 


결혼 2년 후 첫째 아들이 태어나고 돌림자를 제외한 마지막 이름이 산이 되었다. 우리 첫째 산이는 삼대가 덕을 쌓은 태백산 일출 덕분에 태어날 수 있었고 뼛속까지 여행자의 DNA만 가지고 태어났다. 공부 DNA, 모범생 DNA, 정리정돈 DNA 등등 이런 건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참고로 나도 남편도 그 DNA는 아직도 발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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