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에 떨어져 있던 사랑의 시체를
나뭇가지로 밀었는데 너무 가벼웠다
어쩌자고 사랑은 여기서 죽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개나 고양이가 파헤쳐버릴 테니까
그냥 날아가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 꿈에는
내가 두고 온 죽은 사랑이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
죽은 사랑은
집 앞을 서성이다 떠나갔다
사랑해, 그런 말을 들으면 책임을 내게 미루는 것 같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그저 무책임한데
이런 시에선 시체가
간데온데없이 사라져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 날 공원에 다시 가보면
사랑의 시체가 두 눈을 뜨고 움직이고 있다
/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황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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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을 조심하라기에 몸에 좋다는 건 다 찾아 먹였는데 밖에 나가서 그렇게 죽어 올 줄 어떻게 알았겠니"
너는 빵을 먹으며 죽음을 이야기한다
입가에 잔뜩 설탕을 묻히고
맛있다는 말을 후렴구처럼 반복하며
사실은 압정 같은 기억, 찔리면 찔끔 피가 나는
그러나 아픈 기억이라고 해서 아프게만 말할 필요는 없다
퍼즐 한 조각만큼의 무게로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퍼즐 조각을 수천수만 개 가졌더라도
얼마든지 겨울을 사랑할 수 있다
너는 장갑도 없이 뛰쳐나가 신이 나서 눈사람을 만든다
손이 벌겋게 얼고 사람의 형상이 완성된 뒤에야 깨닫는다
네 그리움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보고 싶었다고 말하려다가
있는 힘껏 돌을 던지고 돌아오는 마음이 있다
아니야 나는 기다림을 사랑해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마당을 사랑해
밥 달라고 찾아와 서성이는 하얀 고양이들을
혼자이기엔 너무 큰 집에서
병든 개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펑펑 울고 난 뒤엔 빵을 잘라 먹으면 되는 것
슬픔의 양에 비하면 빵은 아직 충분하다는 것
너의 입가엔 언제나 설탕이 묻어 있다
아닌 척 시치미를 떼도 내게는 눈물 자국이 보인다
물크러진 시간은 잼으로 만들면 된다
약한 불에서 오래오래 기억을 졸이면 얼마든 달콤해질 수 있다
/ 슈톨렌, 안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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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
사람들이 자신의 끔찍함을
어떻게 견디는지
자기만 알고 있는 죄의 목록을
어떻게 지우는지
하루의 절반을 자고 일어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흰색에 흰색을 덧칠
누가 더 두꺼운 흰색을 갖게 될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은
어떻게 울까
나는 멈춰서 나쁜 꿈만 꾼다
어제 만난 사람을 그대로 만나고
어제 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징그럽고 다정한 인사
희고 희다
우리가 주고받은 것은 대체 무엇일까
/ 캔들, 안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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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다 읽어갈 때쯤 H의 전화를 받았다. H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사랑에 열정적인 사람으로,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마음과 시간을 온통 빼앗겨 버리는 습관이 있다. H는 지금 열렬한 짝사랑을 하고 있는데, 그가 이팝나무의 수수한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이라 좋다고 했다. 나는 H에게 이팝나무가 사실은 굉장히 화려하지 않냐고 이야기했지만 H에게 그것은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고, H는 이팝나무가 지는 계절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만개한 꽃들이 질 때까지만 사랑을 품고 있겠다고, 그때가 되면 이 흔들림도 정리가 될 것 같다고. 사실 나는 알고 있다. H는 꽃이 지더라도 사랑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할퀴고 흠집 내서라도, 마음을 다 쓸 때까지 지속하는 것이 H의 사랑이기 때문에.
나는 H의 사랑을 떠올리며 내 사랑의 습관을 점검해 본다. 내 사랑의 습관은, 언제나 그것이 죽은 자리를 더듬어 보는 것이었다고. 어렴풋이 깨닫는 마음이 있다. 사랑이 생동하는 순간에도 시체를 더듬어 찾는 일, 지나치게 충만한 기쁨에서도 슬픔을 끌어올리는 일. 그것이 내게는 사랑이었다고. 부서지고 싶지 않아서, 혹은 부서지기 위해 골몰해 온 마음들이 끔찍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올곧게 다정해지는 일이 어려워서 있는 힘껏 돌을 던진 적이 있다. 물크러진 기억을 오래오래 졸이다 보면 달콤해질까. 나는 여전히 모든 것이 궁금해서 주어 없는 문장들을 반복한다. 징그럽고 다정한 인사들을 되뇌어 본다. (24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