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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말티즈 Mar 03. 2024

훈련소

공중방역수의사의 시작

 꽃샘추위가 한 풀 꺾이고 따스한 봄바람에 들꽃이 수려하게 자연을 채색할 무렵, 까까머리를 한 낯선 동기들이 훈련소 앞에 모였다. 150명의 공중방역수의사들이 입대를 앞두고 가족들과,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입대자들에게서 어느 정도 연륜이 느껴지는 걸 보면 전문연구요원, 공중보건의, 공중방역수의사와 같은 대체복무자들이 같은 날 입대를 하는 듯했다. 코로나로 온 지구가 떠들썩했던 시기이다 보니 다소 엄격하게 거리 두기를 유지하며 훈련소로 들어섰다. 그렇게 15기 공중방역수의사의 짧은 훈련소 생활이 시작되었다.


 3년이 다 된 기억이다 보니 미화되었을 수 있지만, 훈련소 생활은 걱정했던 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친한 동기와 한 방을 쓰게 되어 적응에 많은 도움을 받았고 체력에도 자신이 있던 터라 훈련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가장 큰 고비는 입소 후의 격리 기간이었다. 사회에서도 코로나로 인한 격리가 지옥 같았지만 훈련소에서의 생활은 격리수용소에 가까웠다. 방 안에 갇혀 멍하니 하루를 보내야 했고, 가져온 책은 3일 만에 동이 나 버렸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는 경광봉을 복도로 흔들어 조교를 불러 웨이팅을 신청한 다음 앞선 인원들이 모두 이용한 후에 갈 수 있었다. 점심 식사는 식당이 아닌 방에서 배식을 받았고 양치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다행히 가글을 가져왔기에 화장실을 갈 때 가글을 물고 가서 입을 헹구는 식으로 대체하였다. 한 번은 입에 가글을 물고 화장실에 가는 중에 중대장님이 갑자기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나머지 머금고 있던 가글을 삼키고 대답을 했는데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제대로 씻지 못했기에 온몸이 찝찝했다. 아마 모두가 한마음으로 격리가 끝나는 날 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10일가량이 지나자 선별진료소에 가서 검사를 받고 자유를 쟁취했다. 격리 기간에는 TV를 통한 정신교육만 받았다면 이제는 실제 훈련을 시작했다. 몸을 좀 움직이니 찌뿌둥했던 몸이 개운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샤워라니! 물론 씻을 즈음에 따뜻한 물이 떨어져 샤우팅 속에서 샤워를 한 적도 있지만, 매일 씻을 수 있는 일상의 행복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때부터는 훈련소가 마냥 삭막하지만은 않았다. 생활관 동기들과도 많이 친해졌고 우리를 통제하는 현역병 조교들과 직업군인인 소대장님, 그 위로는 장교 출신인 중대장님은 규율이 지켜지는 한 우리를 존중해 주었다. 내 상상 속의 군대는 계급을 통해 억압하고 통제하는 느낌이었다면, 실제로는 보다 사람 냄새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더군다나 이때부터 사회에서 편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여자친구가 소중한 편지를 자주 써 주어 더욱 힘을 낼 수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연인의 목소리와, 가족들의 목소리가 참 소중하게 다가왔다.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소중한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퇴소가 가까워지자 훈련소의 창 밖으로 벚꽃 잎이 흩날렸다. 창 밖을 바라보며 우리는 앞으로의 공중방역수의사 생활에 펼쳐질 꽃길을 상상했다. 그즈음 모두를 멘붕에 빠트린 사건이 일어났다. 느닷없이 배치지를 정한다며 전원 강당으로 모이라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다른 생활관에서 지냈던 동기들도 우리 생활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반가운 인사를 나눌 여유가 없었다. 이 날 뽑는 번호표 하나에 나의 향후 3년이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훈련소 종료 후 모두 모여 교육을 받으며 배치지를 결정해 왔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전원이 모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불가피하게 훈련소에서 배치지를 정하게 된 것이다. 예고 없이 일어난 일이라 통제가 되지 않아 군인들도 언성이 높아졌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행복과 근심만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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