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uroo Apr 16. 2020

가벼운 것이 좋아.

하루 종일 드라마를 본다. 드라마를 틀어놓고 밥도 먹고 청소기도 돌리고 설거지도 한다. 그냥 그렇게 성의 없이 틀어만 놓고 봐도 모든 것이 다 이해되는 그런 가벼운 것이 좋다. 깃털처럼 가볍게 나를 스쳐지나가는 느낌, 그게 좋아져 버린 거다.


나는 늘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왔다. 이를 테면 메모를 하지 않고는 따라가기 힘든 철학책이라던가 한 커트만 놓쳐도 다음 커트가 이해되지 않는 예술영화라던가. 나는 그런 것들에게만 늘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해왔다. 참으로 부끄러운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무게가 가볍다 하여 그 가치가 덜하거나 그것이 갖는 함의가 보잘것없는 것이 아님에도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해왔던 거다.


물론 단순히 그럴듯해 보인다는 이유로 그런 것들을 내 취향으로 분류해왔던 것은 아니다. 사람은 사유를 통해 성장한다. 나는 나를 자꾸 생각하게끔 하는 것들에 자연스럽게 끌렸을 뿐이다. 그렇지만 때때로 잔인한 삶에 질려 사유란 단어가 사치스럽게 느껴질 땐 그런 나 역시 가벼운 것을 찾는다.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가벼운 볼거리를 찾는다. 밤을 새워서 본 넷플릭스 드라마, 요즘 같은 세상에 본방사수를 하며 본 티비 드라마, 티빙으로 몇 번이고 돌려본 예능. 나의 시청 목록엔 영화가 포함되어있지 않다. 영화가 좋아서 영상학을 전공했다고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자소서를 써 내려가면서도 말이다.


나는 여전히 나를 사유하게끔 만드는 것들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지친 나의 영혼을 달래주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나의 고달픈 하루에 작은 위안을 건내는 건 늘 가벼운 것들이었다. 그 작은 위안을 위해 하루를 버텨낸다. 다음화를 보기 위해 일주일을 버티고 다음 시즌을 보기 위해 한 분기를 버티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고대하며 1년을 버틴다. 그저 재미를 주는, 깊은 생각 없이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그래서 더 웃기고, 그래서 더 슬픈, 가벼운 것들.


가벼운 것이 좋아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