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드라마를 본다. 드라마를 틀어놓고 밥도 먹고 청소기도 돌리고 설거지도 한다. 그냥 그렇게 성의 없이 틀어만 놓고 봐도 모든 것이 다 이해되는 그런 가벼운 것이 좋다. 깃털처럼 가볍게 나를 스쳐지나가는 느낌, 그게 좋아져 버린 거다.
나는 늘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며 살아왔다. 이를 테면 메모를 하지 않고는 따라가기 힘든 철학책이라던가 한 커트만 놓쳐도 다음 커트가 이해되지 않는 예술영화라던가. 나는 그런 것들에게만 늘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해왔다. 참으로 부끄러운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무게가 가볍다 하여 그 가치가 덜하거나 그것이 갖는 함의가 보잘것없는 것이 아님에도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해왔던 거다.
물론 단순히 그럴듯해 보인다는 이유로 그런 것들을 내 취향으로 분류해왔던 것은 아니다. 사람은 사유를 통해 성장한다. 나는 나를 자꾸 생각하게끔 하는 것들에 자연스럽게 끌렸을 뿐이다. 그렇지만 때때로 잔인한 삶에 질려 사유란 단어가 사치스럽게 느껴질 땐 그런 나 역시 가벼운 것을 찾는다.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가벼운 볼거리를 찾는다. 밤을 새워서 본 넷플릭스 드라마, 요즘 같은 세상에 본방사수를 하며 본 티비 드라마, 티빙으로 몇 번이고 돌려본 예능. 나의 시청 목록엔 영화가 포함되어있지 않다. 영화가 좋아서 영상학을 전공했다고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자소서를 써 내려가면서도 말이다.
나는 여전히 나를 사유하게끔 만드는 것들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지친 나의 영혼을 달래주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나의 고달픈 하루에 작은 위안을 건내는 건 늘 가벼운 것들이었다. 그 작은 위안을 위해 하루를 버텨낸다. 다음화를 보기 위해 일주일을 버티고 다음 시즌을 보기 위해 한 분기를 버티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고대하며 1년을 버틴다. 그저 재미를 주는, 깊은 생각 없이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그래서 더 웃기고, 그래서 더 슬픈, 가벼운 것들.
가벼운 것이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