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애 첫 한달살기 #8
싱가포르에 도착한 지는 3일째,
오늘은 저녁에 센토사섬에서 하는 윙즈오브타임을 관람하기로 했다. 밤에 하는 분수쇼라 늦은 오후에 가 해변을 즐기기로 하고 낮에는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나는 로컬 서점을 둘러보기로 했고 남편과 아들은 호텔에서 일과 휴식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늦은 점심에 센토사섬으로 들어가는 트램을 탈 수 있는 하버프런트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하고 싶은 게 다르고 먹고 싶은 게 다르니 우리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움직인다. 여행을 와서도 남편이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일을 하고 그 시간에 나와 아들은 우리만의 시간을 보낸다. 어느 여행지를 가든지 그곳의 서점이나 도서관은 방문하려고 한다. 원래 계획은 그림책 전문 서점을 가려고 했으나 그곳에서 다른 서점으로 가는 동선이 시간상 맞지 않아 서로 가까이 있는 로컬 독립 서점 두 군데를 가 보기로 했다.
지하철, 택시 말고 버스를 타고 가려고 한다.
구글 지도에서 일단 경로를 확인하니 호텔 바로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가서 걸어가면 되는 위치였다. 처음으로 버스를 탔는데 버스 안에 어느 정류장인지 방송도 표시도 없었다. 자주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야 대략 어디쯤 내리는지 알 테지만 처음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이라면 지나치거나 잘 못 내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구글 지도에서 내 위치를 확인해 가며 또 지나치는 정류장 이름을 창 밖으로 살피며 갈 수밖에 없었다. 왜 정류장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건지 모르겠으나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시스템이었다. 그렇다고 정류장마다 다 서는 것도 아니고 내리는 사람이 벨을 누르지 않고 타는 사람이 없으면 그냥 패스하는 정류장도 있었다. 아니면 나만 모르는 버스의 다른 비밀이라도 있는 걸까? 내가 탄 이 버스만 그런 걸까? 어쨌든 버스에서 절대 멍 때릴 수는 없겠구나.
첫 번째로 간 서점은
"Littered with books"이라는 이름의 서점이다.
Duxton Hill에 있는 서점으로 영어책들만 파는 곳이었다. 가게 이름을 해석해 보자면 "책으로 어질러져 있는"이란 뜻인데 꽤 멋들어진 이름이란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보기엔 규모가 많이 작아 보였는데 들어서면 공간이 안으로 길어 판매하고 있는 책들이 많았다. 책이 어질러져 있진 않았지만 중고 서점 같은 느낌은 들었다. 세련되고 멀끔하게 꾸며 놓은 인테리어는 아니어서인지 (그렇다고 고풍스러운 느낌도 아니었다) 책 냄새가 더 날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안쪽부터 구경하기 위해 건물 끝으로 들어가니 그림책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대부분 비닐에 싸여있어 책을 열어 볼 수는 없었다. 아직 겨울이지만 겨울을 느낄 수 없는 싱가포르 날씨에 크리스마스 책과 눈이 배경인 책들을 전시해 두었다. 더운 나라의 크리스마스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모르겠다. 이렇게 책으로나마 추운 겨울의 느낌을 대리만족하는 걸 수도. 어딘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름 나라의 크리스마스 풍경을 그림책으로 만들어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림책에 관심이 많으니 자연스레 그림책 파트와 어린이, 청소년 책에 오래 머물렀다.
이 서점이 좋았던 점은 서점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
러프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느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면 박스를 잘라 동물 그림과 더불어 A, B, C 인덱스를 만들어 책들 사이에 꽂아두었다든가 메모지나 포스트잇으로 써서 붙인 추천글 등이 그랬다. "찢기고 구겨져도 나는 이 책을 추천해"라며 여기저기 붙어 있는 작은 추천글들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조명의 낮은 조도도 이 서점의 분위기에 한 몫했다. 건물 중간에 위로 나있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주변의 조명들의 밝기를 오히려 낮췄다. 그래서 고요하면서도 차분했다. 이런 분위기라 들어오는 손님들 모두 조용히 책장 앞에 서서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입구 쪽 벽 한 면은 전면 책장으로 꾸며놓았는데 다양한 분야의 많은 책들을 표지와 함께 볼 수 있었다. 전면 책장 아래쪽엔 액자틀을 이용해 책을 전시해 놓기도 했다. 나무틀의 액자 가운데 거치대를 만들어 책을 놓고 책이 작품처럼 보이게 해 둔 아이디어가 재밌었다. 서점 가운데에 오래된 책을 한 장 한 장 뜯어 붙인 나무 모형에 책을 전시해 둔 것도 흥미로웠다. 그냥 나오기는 아쉬워 아들이 볼 만한 그림책을 한 권 샀다. 책 값이 비싸기도 했고 짐을 늘릴 수 없으니 당장 읽을 수 있는 얇은 책 중 아들이 좋아하는 올리비아 시리즈 한 권을 구매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품절되어 한국에선 살 수 없는 책이니 더 잘 되었다. 나중에 이 서점의 인스타 계정에 들어가 보았더니 역시나 큐레이션에 엄청 신경을 쓰고 있었다. 매일 소개되는 책들을 보면서 사진 속 책들을 직접 또 만나러 가고 싶었다.
두 번째 서점으로 가는 길,
눈에 들어오는 동네 상가 건물들이 참 예뻤다.
불쑥불쑥 위로 솟아 있는 건물들만 보다 이렇게 이층으로 쭉 늘어선 상가 건물들이 독특했다. 서양 건축물 같기도 하면서 동양 건축물 같은 이 건물들은 이층에 있는 창문들이 위아래로 길어서 더 이국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하얀 건물들 사이사이에 레몬색, 비취색, 핑크색으로 칠해진 건물들이 포인트가 되어 더더욱 예뻤다. 이곳이 이런 예쁜 건물들로 채워진 곳인지 모르고 왔는데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알고 왔어도 좋았겠지만 그랬다면 우연히 얻어진 이런 덤같은 기쁨은 못 느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