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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아리코테지 Jun 21. 2019

•23시 10분 퇴근길 택시 안•

끝이 보이지 않는 야근.

바이어에게 원가계산서의 일부를

보내고 깊은 한숨을 쉬며 시계를 보니

밤 10시 반.


금액과 관련된 업무는 예민한 사항이라 되도록 밤에 하도록 미뤄뒀다. 그도 그래야 할 것이 낮엔 온갖 개발 샘플들이 밀려오고 부하직원들이 올리는 서류들, 메일들, 질문들의 피드백을 하다 보면 머릿속에 예민한 숫자들을 넣을 공간이 사실 부족했다.


이일을 오래 하고 나서 후회한 일이 하나 생겼다.

수학과 담을 쌓았던 것.

사람이 평생 동안 해야 할 공부의 양이 어차피 정해져 있는 건가 하고 의문을 가진 적이 있을 만큼 학창 시절 죽기보다 싫어한 수학으로부터 몇 년째 복수를 당하며 사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복수 치고는 업무에 여기저기 거미줄 같이 퍼져있는 수학적인 뇌를 필요로 하는 일들.

분명 디자인을  전공했고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라 대충 고교시절 수학시간만 잘 버티면 수학과 만날일은 별로 없겠거니 했다.

근데 매일매일을 숫자와 씨름하고 있다니...

역시 내맘대로 예상대로 흐르지 않는 인생.


샘플을 진행하며 치수를 체크하고 요척을 계산하고 그에 따른 원부자재의 단가를 합산하여 바이어에게 보내고. 하루에 수십 스타일의 코스팅을 하느라 정말 머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요즘 나오는 옷들은 또 얼마나 버라이어티 한가..

매번 다른 원부자재와 다른 디자인들의 코스팅은

정말 싫.었.다.


밤 10시가 넘어가면 체력적으로도 쉬라는 신호가 온다. 제일 먼저는 하루 종일 노트북과 컬러를 보며 혹사한 눈과 그다음은 딱딱하게 굳은 어깨, 몹시 불쾌한 느낌으로 부어있는 종아리.

이 시간이 제일 괴롭다.

그만 집에 가서 쉬어 달라는 몸의 신호를 무시하고

보내야 하는 코스팅 메일 자료의 마무리가 끝나지 않아서 마음은 무겁고.. 며칠째 릴레이 야근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두어 개 마치지 못한 스타일은 내일 보내겠다는 메일을 쓰고 그날은 에라 모르겠다 모드로 뻑뻑한 눈에게 그리고 지침에 쩔은 내 몸에게 퇴근을 고했다. 벌써 11시가 넘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습관처럼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친구는 또 이 시간 퇴근 이냐며 위로와 한숨을 건네줬다.

엄마에게 이르기라도 하는 듯 친구에게 힘들단 말을 몇 번이나 하며 그날은  엄살이 아닌 내 치부를 보이 듯한 넋두리를 했다.


“너니까 잘 버티고 있는 거야.. 친구야 내일은 오늘보다 덜 열심히 일해. 검사할 거야..!”


그날따라 친구의 위로가 마음 한 부분을 깊이 찔렀는지.. 전화를 끊을 즈음 코가 찡하면서 뜨거움이 올라왔다.


이런...


조용히 한줄기가 두 줄기가 되고 성대가 아려오는

통곡으로 번질 거 같아 얼른 창문을 내리고 눈물을 말리려는데 이미 택시 기사 아저씨는 알아차리신

눈치다.


창문을 올리고 나니 택시 안에 적막을 뚫고 잔잔한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시는 기사님.


겨우 참은 눈물은 주책맞게 다시 터졌고 이번엔

폭포수처럼 흘렀다.


“어머 기사님 제가 오늘 미쳤나 봐요. 주책맞게 왜 이러죠...”


“오늘 우리 손님이 많이 힘든 날이었나 보네요. 허허.. 난 아가씨 같은 사람 많이 봐서 이상하지 않아요.

도착하려면 아직 남았으니까 집에까지 가서 울지 말고 차 안에서 다 울고 내려요. 나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조금은 대놓고 주책맞게, 그렇지만 초면이라도 마음 깊으신 기사님 덕에 남은 눈물을 잘 마무리하며 집까지 올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빨리 씻고 잠자리에 들어야 수면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겠다는 조급한 마음이 드는 날 보며 아직 정신이 완전히 나간 건 아니라 생각하며 후다닥 정리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그날은 자다 일어나 휴대폰을 보지 않기 위해 전원을 꺼서 거실에 두고 알람시계를 맞추어 머리맡에 두었다.


‘아.. 내일 눈이 팅팅 부어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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